[내외뉴스통신 연재] 조조가 마음만 먹었다면 후한 황제를 폐하고 제위에 오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끝내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후세에 찬탈자로 기록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조조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유 씨 부인이 낳은 맏아들 조앙(曹昻)은 장수(張繡)와의 싸움에서 죽었고, 변 씨 부인 소생으로 큰아들 조비를 비롯하여 조창 조식 조웅의 네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조비(曹丕)는 통이 크고 글재주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예에도 자질을 보여 문무에 두루 능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조조가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며 실전경험을 익히게 했다.

둘째인 조창(曹彰)은 궁술과 마술이 뛰어났고, 맹수와 격투를 할 정도로 힘도 장사였다. 조창이 오환족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용맹을 떨치자, 조조는 '우리 황수아(黃鬚兒, 황색 수염이 나있는 아이)가 참 대단하구나'하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셋째인 조식(曹植)은 총기가 있고 시문에 뛰어나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공융 진림 등 건안칠자(建安七子)들과 사귀었으며, 오언시를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백과 두보가 나오기 이전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넷째인 조웅(曺熊)은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아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파했을 때, 함께 참전했던 맏아들 조비가 제일 먼저 원소의 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조비는 스무 살도 채 안 된 원소의 둘째 며느리 견(甄) 씨 부인을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나중에 조조도 견 씨를 보고 그 미색에 사로잡혔는데, 조조는 견 씨를 맏아들에게 양보(?)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번 전투는 오로지 조비 그 놈을 위해서 한 것 같군!"

위왕이 된 조조는 세자 자리를 두고 듬직한 맏아들 조비와, 시문에 뛰어난 셋째 아들 조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조비를 세자로 세웠다. 처음엔 스승 양수의 도움을 받은 조식이 우세했지만, 발군의 모사(謀士) 가후의 조언을 받은 조비가 나중에 더 많은 점수를 땄기 때문이다.

조조가 죽자 맏아들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조창이 조문(弔問)하러 대군을 이끌고 오자, 조비는 조창 혼자 들어와 문상을 하게 한 뒤 바로 임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조조가 생전에 총애하던 조식은 큰형이 두려워 조문하러 오지 않았고, 결국 조비가 조식을 불러들였다. 조식이 입조하자, 조비는 죽음을 담보로 난제(難題)를 내렸다.

"네가 문재(文才)를 타고났다고 하니 오늘 확인해보겠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형제를 주제로 하되 형제란 말을 넣으면 안 된다. 만일 짓지 못하면 여덟 걸음 째에 네 목이 방바닥에 떨어지리라. 자, 발걸음을 떼어라!"
조식은 정말 문재를 타고난 천재였다. 조식이 발걸음을 떼면서 시를 읊조렸고, 정확히 일곱 걸음 만에 끝이 났다.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을 볶으려 콩깍지로 불을 지폈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안에서 뜨거워 우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몸이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왜 이다지 급하게 볶아대는가

이 시가 일곱 걸음 만에 지었다는 저 유명한 칠보시(七步詩)이다. 여기서 콩은 조식 자신이고 콩깍지는 조비를 지칭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단을 내려와 조식을 끌어안는다.

조비는 위왕이 된 지 10개월 만에 후한의 헌제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위 황제[文帝]가 되었다. 이에 촉의 유비와 오의 손권도 차례로 황제에 올랐다. 바야흐로 삼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원소의 며느리였다가 조비와 결혼, 태자 조예를 낳은 견 황후는 조비가 근간에 가까이 하기 시작한 곽 귀비로부터 '황제를 몰래 해치려고 한다'는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

견 황후가 죽자, 형수를 연모하던 조식은 그녀가 아끼던 베개를 얻어 임지로 돌아가던 중, 낙수가에서 견 황후가 신녀(神女)처럼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읊은 시가 바로 '낙신부(洛神賦)'이다.

조비는 조창과 조식 두 아우를 멀리 변방으로 보내고, 한 곳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계속 임지를 옮기게 하고 엄격히 감시한다. 조창은 병을 얻어 죽는데, 일설에는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조식은 자신의 재주를 써주기를 바라는 글을 여러 번 올렸지만 번번이 조비에게 거절당했고 입조(入朝)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조식의 재주에 대한 시기심에다, 세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원한이 조비의 가슴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조식도 울분 속에 병을 얻어 마흔 한 살에 숨을 거둔다.

막내인 조웅은 조비가 작은형들을 핍박하자 겁을 먹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조비는 제위에 오른 지 7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만다. 마흔 살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조의 네 아들 모두 단명한 셈이다. 어린 태자 조예가 제위를 이어받았다.

조비는 찬탈자라는 비난을 받기는 했으나 황제 즉위 후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국력증강에 힘쓰는 등 무난한 통치를 했으며 대과(大過)는 없었다. 굳이 허물을 찾는다면 동생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점, 조조가 물려준 창업기반을 더 확장하지 못하고 지키기에 급급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조조, 조식과 함께 삼조(三曹)로 불리며 건안문학의 중심에 있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비는 넓은 도량과 공평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썼으니, 더욱 오래 성덕을 쌓았더라면 현군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라고 평했고, '조식은 형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했지만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비운의 천재다'라고 평했다. <다음주에 계속>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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