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연재] 장합(張郃), 자는 준예(儁乂). 하간군 막현 사람이다. 황건적 토벌을 위한 의병 모집에 응하여 한복의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퇴하자 원소에게 의탁했다. 원소군의 교위(校尉)로 임명된 장합은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조조와의 건곤일척의 승부인 관도대전에서 장합은 군량창고가 있는 오소의 경비가 허술한 점을 지적하고, 수비대장 순우경에게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원소에게 진언하였으나, 참모인 곽도는 이를 반대하고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원소는 곽도의 의견대로 오소에 경기병(輕騎兵)만 원군으로 보내고, 주력군은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다. 결과는 장합의 예상대로였다. 조조의 본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기습을 받은 오소의 군량고는 조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순우경의 패배에 입장이 곤란해진 곽도는 '장합은 패배를 기뻐하고, 불손한 말을 내뱉었다'며 장합을 모함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장합은 원소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람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군의 장수 조홍은 '장합은 패전의 책임에 따른 후환이 두려워 투항한 것 같다'며 장합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했으나, 참모 순유는 '장합은 자신의 계략을 채택해 주지 않은 원소에 실망하여 항복하는 것'이라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유의 의견을 받아들인 조조는 장합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오자서는 잘못된 군주를 섬긴 것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에 불행한 최후를 맞지 않았는가. 그대가 내게 온 것은 명장 한신이 항우를 버리고 유방을 섬긴 것처럼 올바른 행동이다"

조조에 의해 편장군으로 임명된 장합은 조조를 따라다니며 오환족과의 전투, 발해에서의 원담과의 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했다. 또, 위남에서는 마초와 한수를 토벌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장합은 선두에서 활약하며 본군이 이동할 길을 열어주었다. 장로가 투항해오자, 조조는 하후연에게는 주장(主將)을, 장합에게는 부장(副將)을 맡도록 하여 유비군에 대항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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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와의 한중 쟁탈전에서, 장합은 파동과 파서 두 현을 평정하고 그곳 백성들을 한중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유비군의 용장 장비와 와구관에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다 패퇴하였다. 유비가 정예군을 10개부대로 나누어 야밤에 기습해왔을 때, 총대장 하후연이 유비군의 노장 황충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유비는 하후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하후연이 비록 우두머리였다고 하나 어찌 부장인 장합에 미치겠소? 만약 장합의 목을 베어올 수 있다면 하후연을 목 벤 것보다 열 배는 나을 것이오"

주장인 하후연보다 부장인 장합을 더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위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하후연의 막료였던 곽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하고 '이 사태는 장합 장군 없이는 타개할 수 없다. 장합 장군은 적장인 유비도 두려워하고 있다'며 장합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장합의 명에 따르기를 결의하자 비로소 장병들의 동요가 가라앉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조조는 사신을 파견, 장합에게 사령관의 부절(符節)을 보내주었다. 그 후 조조가 직접 한중에 도착하자, 장합을 두려워하고 있던 유비는 높은 산에서 지키기만 할 뿐 감히 나오지 못했으므로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장합은 좌장군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막후에 봉해졌다. 그 후 조진과 함께 오를 공격할 때, 장합은 함대를 통솔하여 요새를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자 제갈량이 북벌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위주 조예는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내보냈으나 패퇴하자, 다시 조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촉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역부족으로 패퇴했다.

위조 조예는 어쩔 수 없이 낙향한 사마의를 발탁하여 제갈량의 대군을 막게 했다. 이때 사마의가 선봉장으로 한 사람을 추천하며 함께 가기를 청했다. 위주 조예가 기꺼이 허락하며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장합입니다. 그가 있으면 충분히 대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가장 으뜸가는 장재(將材)가 어전에서 장합을 선봉장으로 쓰겠다고 한 것이다. 가히 장합의 용맹과 기량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이 기산으로 침공, 촉의 선봉장 마속이 가정의 요지 길목을 버리고 산 위에 포진하자, 장합은 산 아래를 포위하여 촉군의 식수로를 막아버리고 불을 질렀다. 사방에서 불길이 오르자 촉군은 더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고, 장합이 이끄는 위군은 촉군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마속의 실패로 한중으로 물러났던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전했을 때, 장합은 촉군 속에 뛰어들어 현란한 창검술을 발휘하며 무용을 떨쳤다. 산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량은 '전에 장비가 장합과 한번 크게 싸웠다는 말을 듣고, 설마 장합이 장비의 적수가 되겠는가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장합은 참으로 용맹스럽고 두렵구나'하면서 장합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장합은 사마의의 지시에 따라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제갈량의 계책에 걸려 목문도에서 촉군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다. 이 소식을 듣고 사마의는 슬퍼해 마지않으며 '장합이 죽게 된 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라고 자책하며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간다. 위 황제 조예는 장합에게 장후(壯侯)란 시호를 내린다.

위의 무장 장합, 하후돈이나 서황 허저 전위 등 기라성 같은 고참 장수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홀로 남아서 조조와 조비, 조예까지 3대째 충성을 다한 용장이다. 무예가 출중했고 군사 통솔에도 능했으며, 위급사태에 빠져도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위(魏)에서 조조 이래 최고의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사마의가 제갈량에 맞서 출전할 때마다 장합을 선봉으로 세웠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장합은 결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늘 용감하게 잘 싸우지 않았던가.

<다음주에 계속>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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