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연재] 삼국지의 최종 승자는 사마 씨라고 할 수 있다. 사마의의 두 아들과 손자가 조조의 후손들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촉과 오를 차례로 병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자신을 닮아 영용(英勇)한 두 아들을 늘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다. 자신의 뒤를 이어 웅지를 펼 인물로 키워내기 위해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위 황실의 실력자 조상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하여 낙향, 권좌에서 소외되어 절치부심하던 사마의는 조상이 황제를 모시고 사냥을 떠나자, 드디어 기회를 포착, 두 아들과 함께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

실권자가 된 사마의는 조상 형제와 그 가솔들을 처단하고 위 황제로부터 승상에다 구석(九錫)의 영예까지 받았다. 사마의가 늙어서 병들어 죽자, 그의 맏아들 사마사가 대장군이 되어 실권자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작은아들 사마소는 표기상장군이 되어 형의 뒤를 받쳐주었다.

그 무렵 오의 손권이 죽자, 사마사는 오를 정벌할 군사를 일으켰다. 왕창과 관구검에게 군사를 나눠주면서 아우 사마소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사마소는 처음에 다소 고전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제갈각이 이끄는 오군과 강유가 이끄는 촉군의 연합 공격을 잘 막아내어 사마의의 죽음 이후 다소 흔들렸던 형제의 지위가 더욱 탄탄해졌다.

위주 조방은 사마사가 칼을 차고 궁궐에 들어오면 옥좌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공포에 떨었다. 결국 조방은 국구 장즙을 비롯한 하후현 이풍 등의 중신들에게 울면서 손가락을 깨물어 용봉적삼에 쓴 밀지를 주며 사마사 형제를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곧바로 그 정보를 입수한 사마사는 세 사람이 미처 궁궐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들을 추궁, 결국 장즙의 몸에서 밀지를 찾아낸다. 사마사는 세 사람을 저자거리에 끌어내 목을 베게 한 후 그 가솔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아울러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위조 조방을 못 본 체하고, 장즙의 딸 장 황후를 비단으로 목 졸라 죽이게 했다. 오래 전에 조방의 할아버지인 조조가 복 황후를 죽였을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제 사마사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마사는 다음날 위주 조방을 쫓아내고 조비의 손자인 조모를 제위에 오르게 했다. 조모는 사마사에게 먼저 절을 하고 전각에 오를 만큼 이름뿐인 천자였으니 이때 조조가 세운 위는 이미 망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몇몇 무장들이 반기를 들자, 사마사는 왼쪽 눈 밑에 있던 혹을 짼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정, 반란군을 평정했다. 그 와중에 다시 그 눈을 다친 사마사는 마침내 자리에 누웠고, 얼마 안 있어 죽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아우 사마소에게 대장군의 인수를 맡기고 뒷일을 당부했다.

형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은 사마소는 위주 조모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아직도 위 조정에 충성하려는 세력이 남아있었다. 진동대장군 제갈탄이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사마소의 심복인 종회의 계책에 빠진 제갈탄은 수춘성에 갇혀버렸고, 그를 도우러 온 오군도 미덥지 못해 결국 수춘성이 함락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를 틈타 촉의 강유도 군사를 이끌고 위를 침공했지만 사마소는 등애 부자를 보내 막아내게 했다. 사마소는 물러가는 강유를 쫓아 촉을 공략하려 했으나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위 황제 조모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도성을 비울 수가 없었다.

사마소는 위주 조모에게 구석을 청했다. 내심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구석을 내린 조모는 분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림군을 이끌고 사마소를 죽이려 나섰다가 오히려 사마소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황제가 피살된 것이다. 사마소는 다시 조조의 증손자뻘인 조환을 새 천자로 세웠다. 이가 바로 위의 마지막 황제이다.

이때 사마소는 드디어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 종회를 시켜 강유를 치게 하고, 등애를 시켜 다른 길을 통해 촉의 성도로 쳐들어가게 했다. 촉장 강유가 국경에서 분전하고 있는 동안 환관 황호에게 놀아난 촉주 유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등애에게 항복하고 말았다(262년). 유비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촉은 그 아들 대에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위의 대신들은 촉을 병합한 사마소를 왕으로 봉해야 한다는 표문을 올렸고, 아무 실권이 없는 위주 조환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사마소를 진왕으로 봉했다. 진왕 사마소는 큰아들 사마염을 세자로 세웠다.

여담 하나.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에서 완적(阮籍)이라는 재사(才士)가 있었다. 시문과 거문고 연주 솜씨가 뛰어나고, 특히 술을 좋아해 두주(斗酒)를 불사했다. 그의 부친 완우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조조의 속관을 지냈다. 완적의 명성을 흠모해오던 사마 씨 형제가 완적에게 조정으로의 출사를 요청했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던 완적은 조정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완곡하게 거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종사중랑직을 맡았다.

그 후 대권을 잡은 사마소가 완적의 딸을 자신의 아들 사마염과 결혼시키려고 사자(使者)를 보내왔다. 이번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내놓고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완적은 궁리 끝에 두 달 동안 내내 술에 취해있음으로 해서 사자로 하여금 아예 말을 꺼낼 기회를 주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에도 사마소의 심복인 종회가 여러 번 시사(時事)에 대해 묻고 이를 꼬투리 잡아 죄를 물으려 했지만, 완적은 계속 술에 취해있음으로 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각설하고, 제위에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던 진왕 사마소, 갑작스런 풍병으로 쓰러졌다. 다음날 중신들이 문안을 갔을 때 중풍으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세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숨을 거두었다.

침착한 성격으로 병서에 밝았던 형 사마사는 아버지 사마의 사후의 혼란을 수습, 안전하게 동생 사마소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통솔력이 뛰어나고 권모술수에 능했던 동생 사마소는 다시 그 권력을 탄탄하게 다져서 맏아들 사마염에게 물려준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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