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새해가 밝았다. 벌써 작년이 돼버린 2013년을 돌이켜본다면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이 산더미지만 이번만큼은 작년에 만났던 그녀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 달 30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과 몇 일전이지만 해가 바뀐 만큼이나 감회는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녀가 기자인 날 만나려 찾아온 곳은 필자의 일터인 사무실이다. 비록 넓진 않아도 업무를 보는 점에서는 손색없는 곳이다.

그녀는 먼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직업소개가 적혀있었다. ‘지휘·오페라 코치’, ‘작곡가’, ‘음악이론가’… 국내에서의 교수, 교사 등의 명칭을 비교하자면 생소한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유수연’. 국내 언론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고 또 타국에서도 인정받은 음악가다. 오늘은 지난 30일 인터뷰에 응해준 유수연 양의 삶과 고뇌 그리고 목표를 정리하고자 한다.

지휘·오페라코치, 작곡가, 음악이론가. 다소 생소한 직업이다. 직업과 본인 소개를 해달라.

나의 본격적인 음악인생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시작된다.

먼저 작곡 음악이론을 학사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필수 과목인 발성법 수업을 듣게 됐다. 아마 내가 여태껏 음악공부를 하던 기간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좀 더 디테일한 공부를 하고 싶어 성악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27세에 외국에서 성악을 시작한다고 덤벼든 것이다.

물론 성악과 입학시험에서 낙방도 했다. 하지만 낙담은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 때마침 ‘될 때까지 한다’는 나의 유별난 집념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 평소 아껴 주시던 교수님께서 나를 불러 심각하게 질문을 하셨다. “그렇게 노래가 하고 싶냐?” 나는 교수님의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라고…

즉각적인 나의 답변에 교수님께서는 잠시 머뭇하셨지만 이내 되물으셨다. “노래와 피아노를 계속하면서 직업도 가질 수 있는 전공이 있는데 그걸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 전공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오페라코치다.

오페라코치는 지휘를 비롯해 오페라음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음악적인 요소들을 분석하고 공부하며 그것을 통해 무대 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악가와 함께 작업을 한다. 지휘자가 무대의 오케스트라와 성악 등 모든 것을 컨트롤 한다면, 오페라코치는 성악적인 부분을 무대 뒤에서 전적으로 관여한다.

하지만 오페라 코치는 단지 성악반주자가 아니다. 오케스트라 음악을 피아노로 만들어 내며 성악가가 실제 오페라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잘 호흡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때에 따라선 지휘자보다도 더 까다로운 요구로 성악가를 훈련시키기도 한다. 작곡가의 음악스타일과 시대적인 경향, 관습적인 연주어법과 오페라 대사의 언어적인 뉘앙스, 오케스트라의 음향과 섬세한 음색, 성악적인 발성과 호흡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오페라 코치를 할 수 없다.

지금을 돌이켜본다면 오페라코치는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그때 교수님의 조언이 따라 이론과 실제에 걸쳐 다양한 분야를 전공으로 삼아 공부했던 것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음을 확신한다.

보통 예술인들은 완성작품을 대중들에게 보임으로써 존재가치를 입증한다. 그러나 유수연 님은 작품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먼저 내가 오페라에서 직접 연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가치가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코치’라는 직업이 다 그렇지 않을까? 운동경기에서의 코치역할이 오페라에서의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선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고 선수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듯이 말이다.

나와 함께 작업한 성악가들이 무대에서 이뤄내는 결과물이 즉 나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자들이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그 시간 동안은 나도 연주를 하는 것만큼이나 긴장되고 떨린다.

이러한 삶을 방향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에서 오페라 코치 일을 하면서 수많은 성악가들과 작업을 해봤다. 또 그 작업을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하나씩 찾기 위해 애썼다. 비단 음악적인 작업뿐만이 아닌 성악가들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친구가 됐다. 때론 성악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음악적인 테크닉이 아닐 때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것 이외에 보충설명을 하자면 나는 원래부터 교수가 꿈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제일 재밌고 즐거웠다. 나도 모르는 에너지가 솟아나서 흥분케 되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어릴 적부터 나만의 공부하는 요령을 익힌 이유 때문인지 뭐든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요점정리를 잘하는 편이다. 음악을 공부하면서도 이런 점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에 큰 장점이 된 것 같다.

또 사람들과 대화와 유대관계를 가지는 것을 좋아한다. 또 이런 점들이 같이 음악을 공유하는 이들과 소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으리라 본다. 음악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개개인의 사연이 담긴 사연을 알게 됐고 가슴속에서만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렇듯 커뮤니케이션의 즐거움이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끔 외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연주자들이 결점 없는 완벽한 연주를 위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느끼며 그것을 편안하게 나눌 수 있도록 호흡을 같이 해 줄 수 있는 오페라 코치가 되고 싶다.

어렸을 적 건강과 상황이 많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과거를 회상한다면?

음악과 나의 인연은 참으로 질긴 것 같다는 대답을 먼저 하고 싶다.

먼저 유치원을 다니던 시기를 추억하자면 음악에 관심이 많았었던 것 같다.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여섯 살 유치원에 다녔을 적 아래층에는 피아노학원이 있었다. 나는 그 아래층에 내려가 문을 조금 열고 그 피아노학원을 몰래 훔쳐보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부모님에게 피아노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흔쾌히 부모님은 승낙해주셨지만 당시 맞벌이를 하신 부모님은 시간을 내지 못하셨고 내가 집적 회비를 받아 등록했다.

또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반주를 했다. 재밌는 건 악보가 없었다는 거다. 생각해보라.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가 악보 없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는 것을…

당시 나는 그것이 당연하고 생각했다. 그 덕분인지 나는 전문적인 이론이나 실기 교육 없이 경험을 통해 혼자만의 음악적인 세계를 키워왔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이 꿈은 접었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족들은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살고 있었고 피아노를 사지 못해 종이건반으로 연습할 만큼 집안환경은 유복하지 못했다.

남들이 듣는다면 일찍 철이 들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으로 진학해 판사가 되기로 했다.

판사가 되려면 공부를 굉장히 잘해야 한다. 그 꿈을 가진 이유 때문인지 다른 건 몰라도 공부하나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했었다.

그러나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말 백혈병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체력이 떨어졌다. 때문에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질 않아 법대에 가기로 정한 나의 진로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남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도 그때는 잠깐 좌절을 했었던 것 같다.

앞날의 진로를 가지고 당황하던 시기 지금은 필리핀 선교사로 계신 목사님의 사모님이 제안을 하셨다. “음악을 다시 해보지 않겠냐”고 말이다.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게 운명인가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망설임 없이 나는 많은 전공 중 작곡을 택했다. 이유는 연주 전공에 비해 입시를 준비하기에 수월한 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작곡가’라는 직업이 왠지 모르게 멋있게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집안형편문제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 한국의 예술관련 진학비용도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솔직히 국내 예술관련 진학비용은 대학과 대학원 등 상위학업과정으로 진학할수록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때문에 나는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결심했다. 부모님도 한 치의 반대도 없이 내 꿈을 위해 유학을 보내주셨다.

유학생활 부모님을 떠올려보면 고마움과 미안함에 가슴이 미어진다. 부모님은 무남독녀인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셨다. 나에게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빚을 지셔서 생활비를 보내주셨고 월세 원룸에 생활을 하시면서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하지만 마냥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을 안겨드리는 것은 내 마음속으로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기회가 찾아왔다. 외국인 장학생으로 선정된 덕에 일정 부분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교내에서 오페라코치로 일할 기회를 얻게 돼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릴 수 있었다.

이미 지난 얘기지만 때론 돈이 부족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오스트리아 은행의 마이너스 통장을 이용해 급한 불을 끄곤 했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국내에서도 공부를 할 수 없었나? 외국유학을 통해 공부한 이유는?

국내에서도 음악관련 대학을 진학했었다. 그때 작곡 관련 학과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국내에서 예술관련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선 학비부담이 장난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선택했던 나의 결정은 결코 후회 없는 선택 중 하나다.

외국에서 예술관련 학문을 익히는 대에는 커리큘럼적인 요소와 시스템이 굉장히 잘 세분화돼 있다. 이를테면 타 전공과목도 자신이 원한다면 비용 없이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거다. 또 학생들을 위한 실기와 경험위주의 수업들이 많은 반면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깨닫게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 있다.

국내 예술교육에 대한 인프라 지적도 있는 것 같다. 구체적인 구조적 문제는?

우선 우리나라 음악예술인들 수준은 이미 세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국내 많은 예술인들이 소위 말해 배울 만큼 배웠고, 비록 기반이 서양음악이라 할지라도 그들 못지않게 그 음악을 소화해 낸다. 세계 콩쿨 파이널에서도 한국인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게 다반사일 뿐만 아니라 수상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배운 것을 통한 기량을 보일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반면 국외의 예술인활동 시스템은 굉장히 폭넓다. 도시마다 오페라 극장이 있고 상임 솔리스트와 합창단원이 있어 한 시즌에도 무수히 많은 오페라를 소화해낸다. 하지만 국내에는 외국과 달리 하나의 국립오페라단만이 존재한다. 또 거기에 속한 합창단도 없을뿐더러 시즌마다 솔리스트 오디션이 있다곤 하지만 성악가들이 설 기회도 별로 없다.

국내 예술산업의 실정은 소위 돈이 되고 장사가 되는 뮤지컬이나 K-POP에만 매진돼 광고되고 있다. 반면 오페라는 큰맘 한 번 먹어야 갈 수 있다는 어려운 음악회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결론적으로 광고를 통한 홍보효과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민간 오페라단도 어려운 실정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얼마 전 어느 한 구청행사에 갔다가 관계자 분께 들은 말이다. 매년 행사에 초대되는 인기가수 섭외비로 곡당 몇 천만 원이라는 비용을 지불한다는… 참으로 씁쓸했다. 행사에 특별순서로 참여하는 순수예술 음악가들에게는 재정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고작 몇 만원을 얹어 주지만 인기가수를 부르는 데는 아끼지 않는 현실… 그 가수의 섭외비용금액을 가지고 제대로 된 음악회를 연다면 몇 번이나 열 수 있다.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들도 산더미다. 오페라에도 무대가 연출이 필요하고 더 좋은 효과를 위한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 투자한 만큼 좋은 오페라가 만들어지는 것은 불 보듯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투자자와 관계자들은 상업성이 떨어지고 재정이 어렵다며 답변을 회피한다. 왜 항상 순수한 음악예술분야를 위한 재정은 이리도 없는지 가끔 의구심이 든다. 한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투입되는 비용만큼이나 오페라에도 투자가 될 수 있다면 국내오페라도 세계화시켜 K-POP 못지않은 문화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순수음악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인정받고 음악가들이 맘껏 음악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

음악의 중요성도 일부 말했다. 그렇다면 음악이 왜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악이 없는 세상은 참으로 삭막할 것이다. 음악이 나오지 않는 멜로드라마를 상상해보면 이해가 쉬울 거다.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음악을 통해 우리 생활이 더욱 윤택해 질 수 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도 잠시 음악을 들으며 쉴 수 있고, 또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그만큼 예술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셈이다.

이어 과학적으로 입증된 태아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싶다. 쉽게 정리한다면 태아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감정을 표현한다. 이 감정표현에 있어 가장 크게 미치는 요인은 소리다. 태아는 외부의 소리로 인해 정서가 이미 형성된다. 즉 소리에 대한 요인이 태아의 두뇌를 자극해 성격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음악은 많은 요소들은 담고 있다. 이를 완성해낸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 감정과 심리상태 그리고 사회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음악을 통한 교육은 더욱 중요하다.

즉 정리하자면 산모들이 태교음악을 들을 필요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아가 어떤 성격을 가질 확률은 음악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망을 짧게 정리 해보자.

나는 음악이라는 달란트를 혼자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소통하고 싶다. 내가 배운 것들을 욕심 없이 그리고 교육을 통해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희망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정리하자면 앞서 말한 국내의 음악교육시스템을 외국처럼 세분화하고 전문화시켜 순수음악 분야가 대중적으로도 발전될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하고 싶다. 음악을 할 때는 악(樂)을 학(學)으로 여기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음악이 학(學)으로 인정될 때 진정한 악(樂)으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내외뉴스통신대담=김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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