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연재] 종회와 등애는 위나라에서 사마소 시대를 함께한 발군의 지장(智將)들이다. 태부 종요의 막내아들인 종회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계책에 밝은 참모형 무장이고, 말을 좀 더듬었던 등애는 전방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관형 무장이다.

사마사가 대장군의 지위를 아우 사마소에게 물려주고 죽자, 위주 조모는 이 기회에 사마소의 권한을 약화시켜보려고 사마소에게 계속 허창에 머무르면서 오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참모인 종회의 조언대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낙양가에 진을 쳤다. 깜짝 놀란 조모는 사마소의 벼슬을 더 높여주었다. 종회의 승부수가 성공을 거둔 것이다.

또 위의 장수 제갈탄이 수춘에서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종회는 제갈탄을 구원하러온 오의 장수를 계책으로 귀순시키고 제갈탄을 수춘성에 몰아넣어 목을 베도록 하는 등 반란 진압에도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서부전선을 지키고 있던 등애는 촉장 강유의 침공을 잘 막아내었다. 위 황제 조모가 죽자 실권자 사마소는 조환을 위 황제로 세웠는데, 이때 촉의 강유가 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번에도 등애가 나서서 잘 막아내어 그의 지위와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드디어 위의 사마소는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 종회와 등애에게 대군을 나누어 주며 촉을 정벌하게 했다. 등애는 산길을 뚫으며 지름길로 성도(成都)로 향하기로 했고, 종회는 국경에서 촉장 강유를 쳐부순 후 서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등애는 아들 등충을 먼저 보내 산허리를 자르고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면서 20여일 만에 7백리를 전진하여 성도 인근에 다다랐다. 촉주 유선은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에게 7만 군사를 주며 등애군을 막게 했다. 제갈첨은 처음엔 잘 싸웠으나 결국 패하여 성에 갇혀버렸다. 그러다가 오의 구원병이 오기 전에 아들과 함께 성급하게 성에서 나가 싸우다가 둘 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촉주 유선은 너무도 쉽게 항복을 결정하고 항서(降書)와 함께 촉의 옥새를 등애에게 먼저 보내고, 관(棺)을 싣고 스스로 몸을 묶어 아들들 및 대신들과 함께 걸어가 등애에게 무릎을 꿇었다.
등애는 촉주 유선이 싣고 온 관을 불태우고 결박을 풀어주며 안심시켰다. 등애는 촉주에게 표기장군 벼슬을 내리고 나머지 벼슬아치들에게도 적절한 벼슬을 내렸다. 그런 다음 방을 붙여 촉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전방에서 종회와 싸우고 있는 강유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검각에서 종회의 위군을 막아내고 있던 촉의 장수 강유는 촉주의 항복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강유는 등애와 사이가 좋지 않은 종회를 부추겨서 후일을 도모해볼 생각으로 ‘만약 장군이 등애였다면 나는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고 하며 종회에게 항복했다.

등애가 촉주의 항복을 받자 초조해진 종회는 촉장 강유가 자신에게 항복한 데다 등애보다 자신을 더 알아준다는 말에 고무되어 강유와 화살을 꺾어 맹세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한편, 등애는 낙양에 있는 사마소에게 승전 소식을 올렸다.
"이제 촉을 평정하였으니 여세를 몰아 오를 쳐야 할 것입니다. 먼저 농우의 군사 2만과 촉병 2만을 보내 준비를 하게 하십시오. 촉주 유선을 낙양으로 끌고 가면 오에서 겁을 먹게 되니 우선 부풍왕으로 봉하고 그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내리는 체 하십시오. 그러면 오는 금방 우리의 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실권자 사마소는 등애가 이런 엄청난 일을 제멋대로 처결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지만, 우선 달래기 위해 등애의 직급을 올려주면서 ‘그 일은 천자께 아뢴 뒤에 할 일인 만큼 함부로 처결하지 마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등애는 밖에 나가 있는 장수는 임금의 말도 듣지 않을 때가 있다며, '급한 일은 제가 알아서 행할 것인 바, 부디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글을 다시 사마소에게 보냈다. 이때 종회가 '등애는 촉인들의 환심을 사는 일만 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반역을 할 것입니다'라고 표문을 올렸다.

사마소는 사자를 종회에게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라 명하고, 자신이 친히 장안까지 따라가겠다고 했다. 이에 한 신하가 '종회의 군사는 등애의 군사보다 몇 배나 더 많습니다. 종회더러 등애를 잡아라 해놓고 왜 장안까지 몸소 나가시려 합니까?'하고 묻자, 사마소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지금 등애 때문에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종회 때문에 나가려는 것이다"
사마소의 정치 감각이 참으로 비범하지 않은가. 종회는 감군(監軍) 위관에게 수십 기를 주며 등애 부자를 잡아오게 했다. 위관은 한밤중에 성도에 잠입, 잠자고 있던 등애 부자를 체포하여 수레에 실었다. 등애의 부하들이 저항하려고 했으나 종회의 대군이 몰려오자 모두 도망쳤다.

종회는 등애의 머리를 채찍으로 내리치며 화풀이를 하고는 수레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때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장안에 와있다는 소식이 오자, 종회는 사마소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반역을 결심한 종회, 강유에게 말했다.

"내 결심은 섰소. 잘 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못 되어도 유비처럼 서촉을 지키며 살 것이오"

다음날 아침, 종회는 '조정의 곽 태후가 돌아가시면서 내게 사마소는 천자를 죽인 대역무도한 자이니 그를 죽이라는 유조(遺詔)를 남기셨다'고 하면서 부하장수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종회의 부하장수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종회는 이들이 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에 강유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종회가 피살된 후, 군사들이 수레를 추격하여 등애를 풀어주었으나, 성도로 돌아가던 등애 부자는 감군 위관이 보낸 군사들에게 잡혀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종회는 강유의 꼬드김과 사마소의 의심 때문에 반역을 했고, 등애는 월권은 했으되 반역을 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촉 평정의 대업을 이룬 발군의 두 명장, 서로 반목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둘 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다음주에 계속>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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