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과 하고 싶은 말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지금은 부산시로 편입돼 있지만 약 20년 전까지만 해도 동래군 사상면에 속해있던 한 작은 마을(지금은 부산직할시 사상구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부산시로 바뀔 때까지는 그저 보잘것없는 농촌마을이었던 내 고향은 5 ․ 16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업화의 물결에 휩싸여 온 들판이 검은 공장연기로 뒤덮인 곳이 되어버렸다. 공업화의 물결은 땅투기와 함께 몰려왔다.

부산시가 되기 전에는(우리 동네 한 가운데 제법 큰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을 헐어 제비지로 분양하였음)한 평에 고작 1원밖에 안하던 땅 값이 수백만 원을 호가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토박이 중에 땅부자가 된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외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지금은 큰 형님 집이 되었다)은 사상면에서도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 몇 안되는 땅부자에 속할 수 있었다.

한창 땅값이 치솟을 때 마을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땅을 팔아치우는 데 열을 올렸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땅을 팔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자손들이 두고두고 고마워 해야 할 일이다.

본래 내 고향은 뒤로는 삼각산이 있고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산 좋고 물 맑은 곳이었다. 일제시대까지는 산림이 울창하여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어릴 적에는 산에서 나무도 하고 고사리를 캐기도 했는데 일제 말기에는 소나무에 칼로 계급장처럼 껍데기를 베어 내 그 아래에 깡통을 매달아 놓고 송진기름(비행기용 연료로 씀)을 모으는 일에 열중했다.

그것을 학교에 가져가면 연필이나 공책으로 바꿔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저수지 공사에 동원되어 어린 나이에 목도(몽둥이를 끼운 가마니 깔판을 앞뒤로 두 사람이 어깨 위에 짊어지고 흙을 담아 나르는 도구)를 지고 일을 하기도 했다.

우리 집 뒤로는 삼각산에서 흘러내리는 조그마한 하천이 있었고 그 바로 앞에 국민학교가 있어 학교까지 가는 데 불과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 옆집에는 목공소가 있었고 또 그 옆에는 일제시대순사 주임(해방 후에 이사왔다)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광동병원이 있었는데 이 세집 아들들이 나의 어릴 적 친구들이다. 광동병원 아들 이기태는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으나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로 집안이 어려워 져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해군 졸병생활을 했다. 그는 나에게 자주 편지를 썼는데 문장이 무척 수려했다.

목공소 아들과 순사집 아들은 나의 국민학교 동창이다. 목공소 아들과는 유난히 친하여 해방되던 해 어울려서 멀리 놀러가기도 했고 담배도 같이 피웠다. 순사집 아들은 6.25때 자기 고향인 산청에 가서 지리산 빨치산에 들어갔다.

그러다 전투중에 부상을 당하여 포로가 되었는데 그 당시 포로가 되면 십중팔구 사형을 면치 못했는데 어린 아이(당시17세)가 워낙 똑똑하여 재판과정에서 구제되었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1년 반 동안 빨치산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를 이틀이나 계속하였는데 빨치산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 100여 명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하고 여자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

그 뒤 책을 쓰겠다고 하더니 생활에 쪼들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3년에 자살을 하고 말았다. 가장 아끼던 친구 하나가 그렇게 되자 나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통함을 느꼈다. 한편으론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 친구(문재옥)가 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빨치산 시절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근무하면서 연락병으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공포탄만 세 번 쐈지 실제 전투를 한 적은 한번도 없노라고 거짓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후 언젠가 나에게 진보당사에 가자고 하길래 따라가 봤더니 조봉암 선생님(이승만 대통령의 라이벌로 후일 사형당함)에게 인사시켜 주던 기억이 난다.

그곳을 나오면서 나는 그에게 “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빨갱이 같애. 너 이런 곳에 다니다간 큰일나겠어”하고 만류하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그는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야만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만일 우리나라 전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네는 그들의 희생물이 되어 숙청되고 말 것이니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반박하곤 했다. 그 친구는 이미 좌경으로 낙인 찍힌 몸이어서 공직생활은 물론 직장을 얻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였다.

죽을 때까지 직장을 10군데나 옮겨 다녔다. 어렸을 적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국민학교 5학년 때 부산중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간 빨치산 생활을 하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입학하고 바로 그 해에 대학(해양대학)에 입학할 정도였지만 대학 3학년 때 데모하다 잡혀 퇴학을 당하니 결국 졸업장 한 장 없는 비운의 사나이가 되고 말았다. 천재로 인하여 불행을 자초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국민학교 시절 나의 담임선생님은 음악교사였는데 나를 무척 아껴 주셨다. 자주 선생님 집으로 불러서 시험지 채점을 맡길 정도였다. 물론 나는 늘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별 걱정 없이 맡긴 것이었는데 한번은 그 친구가 내 성적표를 보고 담임선생께 항의를 했다.

자기가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데 성적이 못 나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오히려 그를 야단쳤다. “걔는 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 너는 공부를 하지 않잖니?”

머리가 좋아서인지 그는 별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도 늘 성적이 좋았다. 1등을 도맡아 하던 그 친구는 우리가 졸업할 때 쯤 이미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 있었다. 대신 천대식(대학교 때 사고로 사망)이라는 친구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나는 맨날 2등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래도 졸업할 때에는 성적이 사상국민학교가 생긴 이래 가장 높은 점수라고 칭찬을 들었다. 국민학교 때는 항상 우등생이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사정이 달라졌다. 전국에서 몰려온 우수학생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 에 우등생이 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나처럼 기차로 통학하면서는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기차는 수시로 연착을 하여 지각을 밥먹듯이 했다. 같은 반에도 기차 통학생이 몇 있었으나 대부분 부산에 있는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기차는 말이 기차지 고작해야 화물기차칸에 가운데 양쪽으로 의자가 몇 개 있는 정도였는데 의자에 앉아서 한가하게 가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문간에 매달려 부산까지 가야 했다. 짓궂은 학생들은 기차위(곱배칸이라 한다)로 올라가기도 하였는데 가끔 깡패학생들이 그곳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아비규환의 통학속에서도 책 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시간의 대부분을 기차를 타고 기다리면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토요일은 학교가 일찍 끝나므로 학교 옆에 있는 구덕 수원지에 몰래 들어가서 낮잠을 자거나 공부를 했다. 저녁 5시 25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족히 1시간은 걸어야 했다. 보통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역까지 1㎞나 되는 언덕길을 뛰어서 가야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가는 날은 전포동까지 전차를 타고 가서 지나가는 빈 트럭을 얻어 타기도 했는데 트럭이 로터리에서 빙 돌면서 속력이 줄 때 뛰어 올라 타는 것이다. 달리는 트럭의 문짝을 잡고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나는 몸이 가볍고(못 먹어서 깡말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철봉을 했기 때문에 트럭 타기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가끔 트럭에 조수가 있을 때는 못 타게 발질로 찼으므로 간신히 올라타서는 조수와 싸움질을 했다. 사람이 많이 탈 때에는 운전수가 일일이 적당한 요금을 징수하는데 나는 항상 돈이 없어 두들겨 맞기가 예사였다.

부친께서는 해방 전까지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자전거 가게에서 근무하다가 내가 태어난 곳에 집을 짓고 독립했다. 독립자금은 그 일본 사람이 대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조그마한 타이어 공장을 차렸으나 운영 미숙으로 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또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뚝방 옆으로 길다란 밭(지금은 산업도로가 되었다)을 개간하였는데 밭 길이가 1.5㎞나 돼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리어카에 퇴비통 2개를 싣고 밭까지 1㎞를 가서 배추, 정구지(부추), 고추, 감자에 거름을 주는 일쯤은 내가 했다.

또 찰벼를 심는 일도 거들었다. 배추밭에는 왜 그렇게 비리가 많은지 일일이 약을 쳐야 만했다. 기차 통학생들의 생활은 대개가 이랬다. 농사도 지어야 하고 기차 타느라 시간도 뺏기니 공부를 잘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동창인 김유수나 최해순 동문은 부산에 친척이 있어 기차 통학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김유수 동문하고는 같은 반이면서도 별로 친하지 않았으나 최해순 동문과는 친하게 지냈다. 중학 시절 방학이면 김해에 사는 최해순 동문, 허종호, 이강월의 집을 순회하다시피 돌아다녔다.

같은 고향 중학동창인 문창윤, 박정규, 이기태 군의 집은 마치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특히 이기태 군하고는 장기 두는 것을 즐겼다. 제법 잘 둔다는 소리를 들으며 온 동네에서 장기 잘 두는 형님들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가난했지만 평화롭던 일상에 파문이 인 것은 중학교 4학년(그 당시 중학교는 6년제였다) 때였다. 그러니까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북한이 남침을 감행한 날이다. 다음 날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가보니 전쟁이 일어났다고 난린데 나는 교실 한쪽 구석에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학교도 문을 닫아 갈 곳이 없어지자 거리를 방황하던 나와 친구들은 군인들에게 붙잡혀 국민학교에 갇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잡혀서 군대 가면 영락없이 죽게 될 것만 같았다. 친구와 나는 한밤중에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도망가다가 잡히면 총살당한다는 소문에 친구가 도망가기를 꺼리자 나 혼자 도주하였다.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라 그곳 지리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 수 있었다. 학교 뒤 당산(교내 조그마한 동산 위에 사당을 모신 곳) 쪽 철조망을 뚫고 도망갔는데 누가 쫓아오는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다. 나는 그 길로 외삼촌이 있는 미군부대(지금의 부산 가야동쪽)으로 가서 취직을 하였다.

처음에는 하우스 보이를 하라고 했으나 싫다고 하자 메스홀(식당)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 식사로는 양놈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 빵(긴 빵의 갓쪽을 자른 부분)과 음식을 주는데 얼마나 맛이 있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너무 고마워서 양놈에게 감사한다를 연발했더니 “Don't worry"라고 하는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 생각해 보니 “너는 안심하고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KP(식당에서 일하는 아이들) 생활을 조금 하다 부산 제5부두에 있는 미군 제55보급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는 이미 영어를 웬만큼 구사할 수 있는 정도(Broken English)여서 무식한 미군의 편지를 쓰는 일을 대행해 주었는데 짧은 작문실력에 제대로 썼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미군들(여러 명의 흑인병사들)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클레버 보이라고 불러 주었다. 식당 청소, 세탁, 가스버너에 공기를 주입하는 일 등을 하다가 나중에는 요리에도 참여하였다. 그 덕분에 지금도 웬만한 서양요리 몇 가지는 척척할 정도다.

한번은 가스버너에 불을 지피다가 가스(휘발유가스)가 너무 나와서 불이 났다. 식당 밑바닥까지 불이 번진 것을 소화기로 겨우 꼈는데 그때 한 미군이 “You fire”(그만두라는 말인데 나는 “너 불냈지”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었다)라고 말했다. 평소 나를 좋아하던 책임자가 "Don't worry, Thank for trouble"이란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또 한 사람의 잊을 수 없는 미군 병사가 있는데 그는 하버드대학 재학생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언젠가 학교에서 미식 발음으로 책을 읽자 발음이 이상하다고 친구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는 것도 다 그 친구 덕분이다.

미군부대에서 세월도 잊은 채 지나는 사이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외삼촌께서 이제 그만 학교에 가 보라고 해서 돌아오자 천막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친구들이 반겼다. 선생님께서는 내주에 전학시험이 있으니 그때 시험을 치라고 하셨다.

우리 고향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시험을 친 결과 재입학을 허락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재입학한 것이었으니 남보다 1년간 공부를 못한 셈이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졸업성적은 형편없었다. 매일 지각을 하느라 시험을 제대로 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시험을 보겠다고 했더니 어머님께서는 반대하셨고 아버님께서는 묵묵무답이었다. 대학에 못 들어가면 너나 할 것 없이 군대에 끌려갈 형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못 가게 하였으나 우리 집에 피난 왔던 개성사람 덕으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서울 에 올라와서 약 4년간 나는 그 분 집에서 먹고 지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서울상대 시험을 본다고 하니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그해 우리 학교에서는 55명이 응시하여 13명이 서울상대에 합격했다. 내가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담임선생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혹시 그 당시 일부 빽 있는 사람들의 자녀가 뒷문으로 들어간다는 소문처럼 나도 그렇게 입학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희망학과를 정할 때 처음에는 의과대학을 원했으나 집에서 반대하여 부득이 상대로 결정했는데 시험 선택과목에 자연과학이 있어 뛸 듯이 기뻤다. 수학과 자연과학 시험은 너무 쉬웠다. 요즘의 중학교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고 싶은 말
학교에 다닐 때나 사회에 나와서도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아니 책이라고는 구경을 하지 못했으니까 후손들에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책을 읽자고 다짐을 하지만 쉽지가 않다. 하다못해 간단한 일기장이라도 마련해 두었더라면 나의 자서전을 멋지게 꾸밀 수가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다.

사람이란 사는 동안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또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상에 나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기지도 못한 채 죽는 사람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고 열심히 일하고 또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훈장이라면 학생들에게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라고 하기 보다는 열심히 책을 읽는 학생이 되라고 하고 싶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자세히 보면 책을 열심히 읽기도 하지만 재미있게 읽는다. 공부가 재미없으면 공부는 하나마나다.

또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기도 하고 자식들에게 재물을 넘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이름도 재산도 못 남기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세상에 이름이나 재물을 많이 남기면 일단 성공한 사람으로 보는 것인가도 모른다.

그러나 이름과 재물을 남겨도 그 자식이나 알지 손자 이후로 내려가면 잊혀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이름이나 재물도 좋지만 글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아니 책으로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좋은 책을 쓴 적이 없으니(세무 관련 전문서적만 2권을 썼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일까. 이제 남은 인생 얼마 되지 않는데... 동기회에서 처음 글을 쓰라고 했을 때는 얼마나 좋았는지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글재주가 없어 글쓰기가 망설여진다. 잘못 썼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이고 또 쓸 것이 없어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는 있지만 열심히 책을 읽지 못했다.

물론 세무 등 전문서적이나 잡지 나부랭이는 많이 읽었지만 이제 남은 여생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매일같이 일하는 것, 공인회계사 업무에 종사함을 계속할 것이고 죽을 때까지 책을 열심히 읽겠노라 다짐해 본다. 또 죽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자리가 마땅치 않다. 고향에 산소도 없고, 고향 공원묘지에 계신 부모님의 옆 자리가 있는데 형님께서 허락할지 미지수다. 천상 화장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 몸은 서울대학병원에 기증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는 중국의 주은래의 부인이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남긴 글귀가 큰 영향을 끼쳤다. “육체는 화장하여 산천에 뿌려 버리기로 남편과 생전에 약속했다. 장례나 추도회는 일체 치르지 말라. 살았던 집은 국가 소유이므로 기념관이니, 주은래가 살았던 집이니 하여 보존하지 말라. 시집 친적이나 나의 혈족이라 하여 조직원칙이나 기율에 벗어나 배려를 하는 것은 지하에 있는 주은래나 나에 대한 모독이다.”

나의 고향산에 오르면 큰 바위가 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의 짧은 인생을 더듬어 본다. 토마스 하디가 쓴 ‘Great Stone Face’의 글(대학교재에 있던 것임)들이 생각난다. 그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다.

문득 논어 중에서 “새는 죽음에 이르러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선하다”는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조덕찬
- 여행칼럼니스트
- 신한회계법인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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