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6)- '수원화성'…사도세자 애도한 옹성


18세기의 군사 문화시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수원화성은 18세기에 완공된 문화유산으로, ‘지극한 효심으로 쌓은 성곽’이다. 옹성까지 갖춘 완벽한 시설로 수원성곽이라고도 한다.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은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제22대 정조(正祖)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주시키고 1794년 1월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9월까지 3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하였다.


정조 14년인 1790년 6월, 강선의 상소를 받은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조정에서 논의하기 시작하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리기로 결정, 수원화성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만든 수원화성은 성곽 면적 18만 8048㎡, 둘레 5744m에 팔달문· 장안문· 화홍문· 화서문의 4대문을 내고, 장락당, 봉수당, 암문· 수문· 적대· 공심돈· 봉돈· 포루· 서장대· 각루· 포사를 설치하였으며, 사직단· 공자묘· 행궁 등의 부속 건물들도 만들었다.


공심돈은 벽돌을 쌓아 세운 것으로 속이 텅 비어 있어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시설로 높이 평가되는 곳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화성은 둘레 약 6km에 이르는 성 안에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물들이 각기 모양과 설계 디자인이 다른 독특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성곽 축성의 모델

수원화성 성곽을 완성한 뒤 1801년에 발간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축성기법,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인력동원, 사용재료의 출처와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공사일지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다.


이 책은 1796년(정조 20년)에 조선의궤청에서 편저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간행한 것으로, 범례, 총목, 시일, 건축설계 등을 밝히고, 화성을 쌓은 모든 일정과 고유문, 상량문, 비문, 공사회계 명부까지 소상하게 적었다.


이는 성곽 축성공사의 개요를 파악할 수 있는 종합 일지를 남겨준 것으로, 수원화성 건축의 발자취와 함께 기록문화유산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활차 등 기기를 이용하여 석재 18만 7600개를 채석 운반하고 벽돌 69만 5000여 장을 쌓아올렸다.


기술자만 3년간 1820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를 연인원으로 보면 한 사람이 37만 6342일 동안 일한 셈이다. 총공사비 87만 3520냥과 인부들의 식사용으로 들어간 양곡도 1500석에 이른다.


종래의 전통적인 축성방법을 기본으로 삼고, 한국 성곽이 갖는 약점을 중국, 일본의 축성술로 보완하였다. 성곽을 쌓는 축성기법을 가장 잘 집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성곽 발달사를 알 수 있게 하는 성곽 축성의 모델이자, 성을 쌓는 건축의 ‘교과서’로서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사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드리려는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쌓은 성이지만,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키고자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까지 총결집하여 쌓은 성곽이다.


규장각 문신이자 실학의 큰 별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한 「성화주략」을 설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지도 아래 조심태가 공사를 총괄하고, 천재 화가 김홍도 등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도 참여하였다.


화강석과 벽돌, 목재의 조화로운 사용, 거중기를 포함한 기기의 발명과 사용, 기능성과 예술성의 아름다움까지 갖춘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과학 문화적 역량을 집약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일부 파손되고 손실된 부분을 되살리면서 육중한 성벽을 따라 40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추어 원형을 그대로 복원하였다.

동서양 축성기술 집약

수원화성이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되는 까닭은 성벽의 바깥으로 드러나는 외측만 쌓아올리고 안쪽에는 자연의 형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방법인 축성기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들의 현실적 생활에서의 학문적 실천 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을 다분히 가미하였다는 것이다.


수원화성은 벽돌과 돌의 맞물려 이어 쌓기, 거대한 돌의 운반과 축성에 거중기 이용,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서양의 성곽 축성기술을 집약한 결정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당대의 학자들이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동서양의 축성기술을 집약하여 성곽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단순한 방어용 성 쌓기에서 벗어나 건축사적 가치와 의미가 매우 크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화성은 모든 건조물들이 하나같이 모양과 디자인이 각기 달라 독특함을 보여주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팔달문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을 포함한 4대문,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차려 드렸던 곳으로도 유명한 봉수당, 방화로 불탔던 서장대, 방어기능과 함께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북문 화홍문,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공심돈, 군사적 목적의 각루인 방화수류정,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 봉돈, 샛문인 암문 등이 바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건조물들이다.


성곽을 쌓은 축성의 동기가 한양성의 남쪽을 지키려는 군사적 목적도 있었지만, 정치· 경제적 측면과 함께 부모에 대한 효심을 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래서 성곽 자체가 효(孝) 사상이라는 동양철학을 반영하는 동시에 정신적 문화유산의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높게 평가되고, 국내외적으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수원시는 매년 10월 화성문화제를 개최해 정조의 효심과 수원화성의 역사성을 기리고 전승한다.

훌륭한 군사방어 시설

수원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지녔고,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꼽힌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성을 깨달은 정조는 당파싸움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원대한 구상으로 한양성 밖의 수원성을 새로운 방어기지로 삼고, 한양성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하여 화성을 만들었다.


수원화성은 본래 흙으로 만든 수원읍성이었는데, 정조 때에 토성을 헐어내고 돌과 벽돌로 성곽을 쌓았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래서 성곽을 복원할 때에 현재의 기술로도 풀기 어려운 점들이 발견되었다. 이때에 나타난 문제점은 계속 연구하고 보완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비운의 ‘사도세자’

제21대 영조(英祖)의 차남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은 비운의 세자인 장헌세자를 말한다.


영조는 정비와 계비 모두에게 소생이 없자,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과 장헌 두 아들을 두었는데 효장은 일찍 죽고 장헌이 큰아들이 된 셈이다.


세자로 책봉된 장헌은 열 살 때 결혼하여 별궁에 거처하였는데, 장성하면서 당파싸움만 일삼는 사색당파, 특히 노론에 싫증을 느껴 학문을 게을리 하고 궁녀와 내시들을 함부로 죽이고 기녀와 여승들을 희롱하는 등 행실이 거칠어졌다.


이에 대한 비판이 왕실에 퍼졌으나 영조는 헛소문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런 차에 세자는 평안도 관찰사 정희량 등의 계교에 빠져 관서지방을 순방하면서 유흥놀음을 한 뒤 돌아왔다. 이를 트집 잡은 반대 세력들이 세자의 폐위를 강력하게 들고 일어나서 세자의 장인이며 영의정인 홍봉한 일파를 몰아냈다.


왕은 세자의 관서 순방의 전말조사를 명령한 뒤 보고서를 받고, 순방에 관 여했던 관리들을 파면시키고 그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으나 이를 따르지 않자,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만든 뒤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 이를 후회하면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려 복위시켰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예우하여 받들고,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수원화성을 쌓았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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