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1)- 조선시대 수난처~대한제국 왕궁 '덕수궁'


덕수궁의 변천사

서울시청 광장 서편,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왕조의 궁궐로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이다. 면적은 6만 3069㎡,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축소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宣祖)가 1593년 음력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왜병들이 대궐을 모두 파손시켜 폐허가 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 월산대군의 사저인 덕수궁뿐이었다. 선조는 이 집을 정릉동 행궁(行宮)으로 삼아 승하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문신 이정구의 <월사집>에 “흉적들이 머물던 집이라 피비리고 더러워 임금의 처소로는 마땅치 않았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내 백성을 버리고 살아 돌아와 무슨 염치로 큰 기와집에 살겠는가?”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덕수궁 주변에는 빈한한 초가가 즐비하였다. 그래서 덕수궁 일대를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빈자들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빈대골’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608년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들어가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이름 지었다. 광해군은 계모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는 동시에, 경운궁을 서궁이라 하였다.


그 뒤에도 이곳에서 인조(仁祖)와 고종(高宗)이 즉위하였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이 들어섰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함녕전 등이 중건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이 즉위한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611년부터 1615년까지는 조선의 정궁이 되었고, 1897년부터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이었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7년 12월에 헤이그 밀사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를 덕수(德壽)라고 하여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종이 1897년 소공동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한 뒤부터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본래 덕수궁은 조선 초기 단종애사를 일으킨 세조(世祖)가 대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세자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준 곳이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도원군 장(暲)이 20세인 1457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세자빈 한씨(인수대비)가 출궁하게 된 것이다. 세자빈 한씨는 이곳에서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 뒤 한씨의 차남 자산대군이 성종(成宗)으로 보위에 올라 입궐하자 그의 어머니는 한씨도 대궐로 들어가면서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아 거처하였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큰아들로서 세조의 큰손자였다.


최초의 왕실 유치원 설립

특히 고종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의 소생인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별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곳이 최초의 왕실 유치원이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

당, 정관헌·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덕수궁 안의 명물인 석조전은 특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로서,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건물이며 그리스 건축을 조형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스타일의 건물로 이채롭다.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건물인 석조전은 대한제국 말에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의 하딩(J. R. Harding)이 설계하고,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 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하고자 지었다. 1층에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은 1945년 8월 광복 이후 미소공동위원회 및 국제연합 한국위원회 등이 사용하기도 했다.


"갓쓴 여인 출입해 국운 해친다"는 전설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大漢門)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한 뒤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한 것이다.


대안문과 관련된 이야기로는, 갓을 쓴 여자의 모양새인 안(安)자를 당시 사람들이 싫어해 안(安)자를 한(漢)자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서 친일파로 유명했던 ‘관기(官妓) 배정자'라는 여인이 보닛(서양식 모자)을 쓰고 덕수궁을 드나들면서 고종을 현혹해 국운이 기울고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해 대안문의 이름을 바꿨다는 해석이다. 안(安)자가 갓(宀)을 쓴 여자(女)라는 말이었다.


또 고종의 비서승인 풍수의 대가 유시만이 대한문으로 개명을 건의해 고종이 이름을 바꿨다는 설도 있다. 한(漢)은 ‘큰 사람’을 의미하는 뜻으로도 프 왜곡해 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의미로 풀이 된다. 대한의 한(漢)은 하늘이라는 뜻이며, 한수는 곧 한강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은하수를 지칭하는 뜻이라는 해설도 전한다.


1903년 12월 22일 대안문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요란스러운 고깔모자를 쓴 무녀가 대안문 용마루에 밧줄을 연결하고 올라서서 한바탕 춤을 추고 내려와 “대안대왕 강천하시다!”라며 큰 소리를 쳤다.


무녀는 출동한 경관에게 붙잡혀 가서 하는 말이 “고종황제에게 아뢰올 기회를 얻지 못해 안타깝습니다”라며 어물거렸다고 <코리아 리뷰>가 해프닝 뉴스로 전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아스팔트에 묻혀 흔적도 없다.


걷고 싶은 명품 거리 ‘돌담길’

정동 덕수궁 돌담길은 무척 아름답다. 계절별로 색깔을 달리한다. 봄에는 새싹이 돋아나는 싱그러움이 넘치고, 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어지는 가로수 녹음 사이로 매미가 울어대는 시원한 그늘길이 드리운다.


낙엽 지는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들이 쏟아져 쌓여 가을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겨울이 오면 하얗게 눈 내린 거리가 차가운 동장군도 쫓아내며 포근함을 느끼게 해 준다. 사계절 너무나 다른 풍경이 연출되는 돌담길이다.


사계절 가로수가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정동 덕수궁 돌담길, 사계절 중에서도 낙엽 쌓인 가을 덕수궁 돌담길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이 절정을 이루기 때문이다. 정동길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가로수의 경관도 빼어나다.


서울시는 길의 정취를 그대로 이어가고자 ‘낙엽 쓸지 않는 거리’, ‘걷고 싶은 거리’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길을 재해석하고 있다. 1999년 서울시가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한 돌담길, 2006년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명품 거리이기도 하다.


100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아름다운 가로수, 걷기 좋게 꾸며진 도로 때문에 정동길은 사계절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슬금슬금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봐도 20~30분이면 길의 끝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정동길을 걷는 발길들은 언제나 낭만의 발걸음으로 출렁거린다. 더 할 수 없는 최고의 산책로다.


휴일이면 관광객과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길을 메우는 거리, 돌담길은 사시사철 사람들로 붐빈다.

창연한 역사와 문화의 거리

정동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에서 걷고 싶은 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최고의 거리로 꼽힌다. 수많은 노래에 등장한 거리, 연인과 함께 걷고 싶은 매력의 거리, 자녀들과 함께 걷고 싶은 역사 문회의 거리이다.


19세기 말 조선으로 들어온 외국의 공관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895년 착공한 정동교회 선교사들도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현대식 교육기관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1885년 설립되어 근대 교육을 시작한 배재학당,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 역시 이곳에서 터를 닦았고,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 겸 커피숍인 ‘손탁호텔’, 성공회 성당, 구세군 본관 등의 종교시설도 정동길에 세웠다.


1883년 한국 신문의 효시로 나온 한성순보에 이어, 1896년 한국 최초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1926년 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지금의 KBS)이 들어섰다. 그래서 근대 언론의 발원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1889년 삼문출판사가 처음으로 활자에 먹을 묻혀 책을 출판하고, 1885년 민간병원인 정동병

원, 1888년엔 처음으로 여성병원인 보구병원(현 이대부속병원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1888년에는 처음으로 개신교회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 전신)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근현대식 건물이 가득한 역사의 거리, 정동길을 걷노라면 아름다운 문화의 향취에 흠뻑 젖어든다. 정동길 한가운데는 최근에 만들어진 작은 비석이 있다.


2008년 세상을 떠난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노래비’가 그것이다. ‘광화문 연가’로 유명한 그는 생전에 이 거리를 즐겨 걸었다고 한다.


비석 앞쪽 분수대 건너편에 있던 옛날 가정법원은 강남 바람을 타고 서초동 법조 타운으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섰다.


옛 건물이지만 내부는 현대식 전시시설로 꾸며졌다. 일 년 내내 볼거리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미술가가 아니더라도 한 폭의 수채화에 잠기게 된다.


미술관 앞에는 고풍스런 ‘정동교회’, 그 옆으로 정동극장이 이어진다. 이밖에 태평관의 이름을 붙인 태평로, 서소문 이름을 딴 서소문동, 조선시대 서울의 방범을 위해 야경 순찰을 지휘 감독했던 순청이란 관아가 있어 붙여진 순화동, 신의주로 가는 길목인 의주로1가, 을사늑약 때 순국 자결한 민영환의 호를 붙인 충정로1가 등이 정동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인 충무로도 지척의 인접 거리이다.




근대적인 외교타운

정동(貞洞)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비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차로 일방통행로는 자동차보다 사람을 배려해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인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을 비롯한 문화시설과 고궁이 있어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인기 있는 거리이다.


돌담길의 시작은 서울시청 광장을 바라보는 대한문 옆이다. 바로 남쪽에는 남대문이 있고 드넓은 광화문 광장을 건너 1km 남짓 떨어진 곳에서 경복궁이 손짓한다. 길의 반대쪽 끝은 서대문 인근까지 이어진다.

4대문 안쪽에 위치한 덕에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양반들의 주거공간이던 곳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잔악한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친일내각의 한을 품었던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단행했던 ‘아관파천’의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이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는 한국 여성 교육의 모태인 이화학당이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 모두 모여 있는 지역이다. 중구 정동은 한적한 덕수궁의 모습과 함께 미국 대사관저와 영국 대사관, 러시아 대사관이 몰려있고 대한문에서 마주 보이는 명동에는 중국 대사관이 있어 강대국의 총성 없는 정보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개화기에는 아관파천의 역사적 격변 현장이자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집중된 외교정치 1번지 근대적인 외교타운이었다. 이렇게 조선시대부터 개화기까지의 격변 시대를 품어 앉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해서 정동은 개화기 초부터 서양 사람들의 마을로 ‘양인촌’이라고 불렸다. 코가 크고, 키가 큰 외국인 공관원, 선교사, 상인들이 이곳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동에 서양풍의 건축물을 지었다. 그런 탓에 덕수궁 주변으로 외국 공관, 학교, 교회, 병원, 호텔, 클럽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들고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정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된 것이 많다. 조선의 개항과 맞물려 서양문화와 문물이 맨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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