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3)- 뽕나무밭 잠실의 상천벽해 '강남신화'



마천루의 ‘한강 기적’

현대 서울의 ‘강남신화’ 출발점이 된 개발의 역사는 일제가 남긴 식민지 근대 경성의 역사적 유산에서 비롯되었다. 총독부가 경복궁 앞을 가로 막는 청사를 짓고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였으며, 광복 이후 그 건물을 대한민국 정부 중앙청으로 활용하였다.


광복 이후 일제가 남긴 물질적 유산을 청산하기도 전에 6.25전쟁의 전화(戰禍)로 잿더미가 되어 전후 서울은 폐허에서 재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외견상 식민지 흔적의 말소와 단절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의 실질적 실행 양상은 일제 강점기 식민 권력의 오랜 관행을 답습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서울은 식민지 시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상 초유의 급속한 성장과 팽창을 경험했다.


유형무형의 각종 식민지 잔재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지녔다. 김영삼 정부 때 중앙청 건물을 일제의 표본적 잔재라며 헐어버렸다.


서울의 행정 구역 면적은 1949년 268.35㎢로, 다시 1963년 613.04㎢로 확대되었다. 인구는 1945년 90여만 명에서 1953년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70년 550만 명을 돌파했으며 1990년에는 인구 1000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따라서 서울이 비정상적 증대로 제3세계 과잉도시화 양상을 드러냈다. 여기서 한강변의 매립지를 개발하여 허허벌판에 신시가지 조성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발상이 나온 것이다.

한강에 대한 종합 대책을 통해 매립지를 택지로 개발하고 제방 위로 도로를 개설하는 것은 주택과 교통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동시에 택지 분양으로 개발 비용까지 확보하는 일석삼조의 방안으로 도입되었다.


여의도 비행장을 외곽으로 옮긴 뒤 그 자리를 부도심으로 개발하고, 이례적인 순환 노선의 지하철 2호선을 건설하고, 강남북을 연결하는 27개의 교량이 한강에 건설되면서 한강변 일대는 서울의 ‘신천지’로 부상했다.


1970년대부터 잠실 지역이 개발되고 잠실동에 올림픽경기장이 들어서면서 빠르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1974년 강남개발 초기만 해도 강남은 독자적인 생활기반시설이 극히 부족하고 절대적으로 강북 의존적인 베드타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강남 8학군’ 조성과 ‘강북억제, 강남개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성장 과실을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새로운 중핵 지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70년부터 1999년까지 30년 동안 서울 인구는 550만 명에서 1030만 명으로 거의 두 배 늘었는데, 그 가운데 강북 인구가 430만 명에서 520만 명으로 1.2배 정도 증가한 데 비해 강남 인구는 120만 명에서 510만 명으로 4.2배나 증가했다. 이 시기 증가한 서울 인구 480만 명 가운데 81%가 강남 지역에서 증가한 것이다.한강 주변에 버려져 있던 저습지에서 출발한 ‘강남’은, 서양식 아파트 건물의 고급 주거지역과 초고층 빌딩의 상업지역으로 천지개벽을 했다.


‘소달구지 마을’에서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양산하면서 ‘한강의 기적’ 핵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잠실로 이어지는 신흥 거리인 테헤란로 일대는 전원의 고요함과 한적함에서 벗어나 한국이 OECD 경제대국의 심장부로 급부상하면서 마천루의 거리로 탈바꿈했다.강남과 강북, 분명히 서울특별시 안의 지역인데도 경제 문화 교육 등에서 하나의 도시 속에 두 개의 도시, 강남 특구로 이질화되었다.


강남개발의 신화는 1974년에 제안된 ‘삼핵 도시 개발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서울의 장기적 도시계획을 강북 단핵 도심에서 강북 도심의 행정 중심, 영등포 도심의 공업 중심, 강남 영동 도심의 금융 상업 중심이라는 3개의 도심 체제로 전환해 기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입법부의 국회 여의도 이전, 사법부의 법원 서초동 이전도 그러한 맥락에서 구상되고 실현된 것이다.

명주실 전설이 황금 땅으로

명주실을 뽑아 비단을 짜던 뽕나무 마을이 비단결처럼 고은 황금 땅이 되었다. 누에치기가 유일한 생업이었던 양잠 마을, 집집마다 누에치는 방을 마련하고 그 방에서 뽕 잎에 누에를 올려 키우는 작잠(柞蠶)을 하던 시골 마을이 바로 잠실이다.옛날에는 뽕 잎 따다가 누에를 쳐서 비단실 뽑고 명주를 자아 만든 비단으로 옷을 해 입는 가문은 한양 장안에서는 손꼽을 정도였다. 그 몇 안 되는 집안사람들을 위해 양잠을 생업으로 삼은 잠실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서울 강남에 잠원동이 있고 송파에 잠실동이 있다. 잠실은 허허 벌판이었던 한강 남쪽 보잘것없는 강변 벌판 땅에 나라에서 뽕나무를 심게 하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정한 곳이다. 풍수설에 따르면 “한양의 풍수에서 안산인 남산은 생김새가 누에 형상의 삼두봉인데 안산을 잘 길러야 도성에 불행이 없고 번창한다”고 여겼다.


여기서 ‘안산을 잘 길러야 한다’는 말은 누에를 먹일 뽕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었다. 다만 뽕나무를 심되 그 지역을 남산을 중심으로 동서남쪽 방향에 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국영 뽕나무 단지를 지정하였는데, 동쪽은 잠실, 서쪽은 연세대 주변, 남쪽은 여의도 공사 때 폭파해서 매몰시킨 밤섬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잠실 아파트 단지로부터 잠원동 신반포에 이르는 한강 남쪽 연안은 신잠실이라고 하였다. 아들 지역 가운데 가장 성행했던 지역은 잠실에서 신반포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저습지에다가 한강이 실어 나르는 비옥한 토질이 쌓여 뽕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랐다.


그때 한양 도성에서는 잠실 뽕나무가 무성해야 태평성대가 된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다분히 풍수지리에 따른 비유에서 나온 말이다.


특히 조선왕조에서 양잠을 적극 장려했던 임금은 제4대 세종, 제9대 성종, 제11대 중종, 제21대 영조였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시대에는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가장 태평시대였고 또한 잠실벌의 뽕나무도 가장 무성했다.


성종 때 학자 성현은 《용재총화》라는 자신의 문집을 통해 ‘동잠실은 성동 아차산 밑에 있고 한강 건너편 연안에 신잠실을 일구었다’고 했다. 이를 볼 때 신잠실은 성종 때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을 장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상전벽해(桑田碧海)란 표현처럼 급격한 변화의 물결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성하던 옛날의 가난했던 뽕나무 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고밀도 부자 마을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강남 모습이다.



88올림픽의 영광 간직

특히 강남 잠실 주변에는 한국 최고층 빌딩과 거대한 호텔과 백화점, 놀이시설 등을 구비한 롯데월드 등이 들어섰고, 지구촌의 축제인 88서울 올림픽대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잠실에는 삼밭인 마전(麻田)이 있었고, 서울 근교의 5진(津) 가운데 하나였던 삼전도(三田渡) 나룻배 포구도 있었다. 다른 곳에는 한강 하류에서 조수(潮水)가 올라왔으나 이 마을의 세 곳에는 물이 올라오지 않아 3개의 밭이 생겼으므로 삼전(三田)이라고 하였다.


1439년(세종 21년)에 신설된 삼전도는 경기도 광주부가 남한산성에 설치되면서 도성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는 통로를 만들면서 생긴 나루터였다. 삼밭게, 세밭나루, 뽕밭나루라고도 불렀다.


병자호란 때는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남한산성 피란 행렬이 강을 건넜던 곳이고,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던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때 인조가 무릎을 꿇었던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일컫는다.

조선왕조 때에 잠실 뽕나무 마을에는 ‘잠모(蠶母)’라는 여인들이 있었다. 잠모는 양잠을 전문으로라는 부인인데 그 기술을 세습하여 가업으로 삼게 하였다. 비단 옷을 선호하는 양반 가문의 여인들이 이 잠모와 줄을 대어 미리 주문을 하면서 필요한 양을 확보하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무명 옷감이 거의 전부였지만 일부 세도가문에서는 비단옷을 입어 그 위세를 과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잠모는 그의 딸들에게 양잠 기법을 전수하여 주면서 자연히 세습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말에 일제가 뽕나무를 베어 버리면서 양잠업도 빛을 잃었다. 그러자 잠모들은 무당으로 전업하게 되었다.


잠모가 무당으로 전업한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뽕나무 고목에게 아들을 잉태하게 해 달라고 기원함으로써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퍼지면서 아들 낳기를 원하는 부인의 기자(祈子) 의식을 잠모가 맡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미신적인 이야기지만, 뽕나무가 아들을 낳게 하는데 효험을 보인 일은 뽕나무가 양(陽)의 상징이라 그랬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잠원동 안동네에 새까맣게 변한 전설의 뽕나무 고목 한 그루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었다는 이 뽕나무 고목이 새까맣게 변한 까닭도 기자(祈子) 의식을 한 부인들이 촛불을 켜서 나무 밑둥치에 놓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할 때 그을린 때문이라고 전한다.


서울시는 이 뽕나무 고목을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해 잠원동의 역사로 전하고 있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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