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4) - 대한민국 국보1호 서울 남대문 '숭례문'



다포형식의 중층 건물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서울 남대문 ‘숭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매우 특징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중앙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되는 건축물인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태조 4년인 1935년에 공사를 시작, 1398년 태조 7년 완성하였다. 그러나 지반 이상이 생겨 1433년 7월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돋운 다음에 새로 짓기로 결정한 뒤, 1447년 8월경 숭례문 신축 착공식을 가졌다.


1448년 3월 17일 새로 지은 숭례문이 또 기울어지는 조짐을 보여 1478년 제9대 성종 9년에 기울어진 숭례문을 수리하기 시작해 1479년 4월 2일 중수 공사를 완공하였다.


1907년 일본 황태자가 방한할 때 숭례문은 또다시 변고를 맞았다.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는 억지 핑계를 대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린 것이다.


일제는 성곽을 헐어낸 자리에 도로와 전차 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돌담을 쌓았다.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하여 주변 경관을 많이 훼손하고 바꾸어 놓았다.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조선 보물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만들어 남대문인 숭례문을 보물 제1호로 지정하고, 보물 제2호에 동대문인 흥인지문을, 보물 제3호에 탑골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보물 제4호에 종로 사거리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광복 이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재보호법을 만들고 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국보 제2호로 지정하고, 동대문을 보물 제1호, 보신각종을 보물 제2호로 각각 지정하였다.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숭례문의 성곽을 좌우로 10m씩 복원하고, 2005년 5월 27일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표상

서울 숭례문은 조선왕조 태조 때 한양의 4대문 가운데 하나로 건축한 도성 성문이다. 남쪽의 큰 대문이라 하여 흔히 남대문이라고 일컫는다.


대문의 이름은 오행사상에 따라 지은 것인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근간으로 동은 인(仁), 서는 의(義), 남은 예(禮), 북은 지(智), 중앙은 신(信)의 5덕(德)을 표현한 것이다.


숭례문의 '례'는 인의예지신의 예에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은 그동안 자동차 도로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었다.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가까이서 문화재를 관람하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 서울시가 여론을 수용하여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그러나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경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길이 솟아오르고 5시간 후인 11일 새벽 1시 54분 진화되었다. 목조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하는 작업을 실시, 육송 15만 1369재(才), 전통기와 2만 3369장, 철물 자재 31종 3만 7563개를 사용하여 복원한 뒤 2013년 5월 4일 복원식을 거행함으로써 옛 모습을 되살렸다.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썼다고《지봉유설》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견들이 분분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대군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인데,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 또한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 때의 잡지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양녕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편액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이나 일반적인 문의 편액은 대부분 가로로 쓴 것인데 비해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도 세로로 썼다는 것도 이색적이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글씨로 써서 달았다고 전한다.

영고성쇠 고난의 역사 지녀

남대문은 조선왕조 시대의 성문 건축 가운데 최대의 목조 건물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무려 620여년의 역사를 지닌 남대문은 그 많은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대한민국의 역사와 더불어 영고성쇠(榮枯盛衰)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


이 문으로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지켜보면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남대문 밖은 초라한 초가집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도심지로 발전하였으니 세월의 격세지감을 안겨주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명에 따라 하삼도(下三道)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떠나는 암행어사가 자기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남대문 밖의 초가 숙소에서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남쪽으로 암행의 길을 떠났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 뿐이 아니다. 조정에서 일하다가 귀양을 가는 선비가 남대문 밖으로 나와 되돌아서서 대궐을 바라보며 북받치는 한(恨)을 되새긴 곳도 남대문이다.


남대문 밖에는 천하의 간신으로 불리는 김안로의 저택이 있었다. 김안로는 제10대 연산군 이후 제11대 중종 때까지 으뜸가는 간신으로 권세를 떨쳤던 인물이다.


그가 죽자 성난 군중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김안로가 살던 고래 등 같은 저택으로 달려가 두들겨 부수고 주춧돌까지 뽑아낸 뒤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 집을 파가저택(破家瀦宅)이라 하고 그 연못을 남지(南池)라고 하였다.


그 뒤 흉악한 죄를 저지를 사람들을 내쫓아 죄를 다스리는 곳으로 삼았다. 이곳은 지금의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이다.


조선 제23대 순조 때에는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극성을 부렸는데, 그때 이를 빗댄 풍자가 남지 주변에서 유행하였다고 이른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허구미가 정승 되었을 때

남지를 다시 팠을 텐데

다시 남지를 파니

남인 정승 또 보겠네.

허구미는 남인이었다. 남지를 메우고 파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이 풍자도 널리 유행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해에 남인의 거두 채제공이 등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혁신 실학파 학자들을 ‘남지의 꽃’이라고 부른 것도 실학이 남인파에서 형성된 탓이다.



'국보 1호'는 관리 번호

“숭례문이 과연 국보 제1호로써 가치가 충분히 있는가?” 라는 말들이 많았다. 국보는 글자 그대로 국가의 보배라는 말이다. 따라서 국보는 보물, 인물, 건물, 문화재 등 그 대상에 따라 역사, 예술, 학술적 가치와 관점,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매우 다양하며 복잡성을 띄고 있다.


숭례문이 대한민국 국보 제1호라는 데 따른 논란도 한 때 불거졌다. 1996년 11월, 국보 제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자, 문화재관리국은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고, 서울대학교는 별도로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서울시민은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고, 문화재전문가 144명 중에서는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대가 과반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에는 57%가 변경에 찬성해 대조를 보였다.


국보 1호를 바꾸자는 변경 찬성자들은 “훈민정음을 국보 제1호로 삼아야 한다”고 꼽았다. 국보 제1호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은 “문화재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 순서가 아니라 단순한 관리 번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국보를 지정할 때 문화재의 가치에 따라 순번을 매기면서 우열을 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교체할 때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 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변경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서의 대표성이 약하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부족하며, 일본이 강점기에 일방적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화마(火魔)의 악몽을 딛고 다시 옛 모습을 찾아 국민 품으로 돌아온 남대문, 역사의 숭례문은 지금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서 장엄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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