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6) - 자주독립 국가의 심벌 서울 '독립문'


주권국가 상징의 기념물

서울 독립문(獨立門)은 1896년 11월 20일 건립된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물이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자주독립 국가임을 상징하기 위하여 서울 서대문 현저동 영천 사거리에 세웠다.

본래 조선시대 때에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을 영접한다는 의미로 세운 영은문(迎恩門)이 있었는데 이를 헐어내고 그 터에 세운 문이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독립협회는 영은문 자체가 중국에 대한 조선의 사대주의 사상의 발로이며 치욕의 문이라 하여 헐어버렸다.
영은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세운 독립문은 암울하던 조선 말기 자주민권(自主民權) 자강운동(自强運動)을 기치로 표방한 대표적 기념물의 하나이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영은문 옆에 세운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다.

처음에 독립문을 짓자는 발의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서재필이 하였는데, 대중들의 호응이 너무나 뜨거워 성금 운동이 큰 물살을 타면서 활기차게 이루어졌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 때에 고가 자동차 전용도로를 건설하면서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정도 이전하여 다시 세웠다.
2009년 10월 28일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굴욕 아닌 자주외교의 기치

역사는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며 돌아가고 사건들이 연결고리처럼 이어지는 것이다. 독립문을 세운 것도 그런 역사의 고리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이 청나라에게 당한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비극, 삼전도의 굴욕은 결국 독립 의지에 불길을 지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인조와 조정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포위를 당한 채 항전하였으나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항복하고 말았다.

때는 명과 청나라 사이에 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만 명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은 인조 5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을 당했고 그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나라와의 관계를 지켜왔다.

그러나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조정은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친명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1636년 12월 2일, 10만 군사로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인조는 남쪽으로 피신할 길이 막히자 급한 나머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천혜의 요새지인 남한산성에서 1만 3000여 명의 조선군이 청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와 달리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12월 19일 죽산에서 멈추었고, 12월 27일에는 강원도 근왕병이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근위병마저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도 퇴각함으로써 남한산성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전에 조정 대신들과의 회의를 거쳐 수전(水戰)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세자빈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를 강화로 옮겨 봉안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명나라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1637년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 그날 오후에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비축한 식량이 거의 떨어지고 추위 속에 남한산성에서 시달리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1월 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항전의지를 잃어버렸다.

결국 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함으로써, 병자호란은 막을 내렸다.

남한산성은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독립협회서 국민성금으로 건립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스위스의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일명 사바틴)이 설계 시공했고, 김가진이 현판 글씨를 썼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 때에 당나라를 상국(上國)이라 하여 받들고 조공을 바친 이후 고려시대의 송, 원나라와의 관계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치면서 우리 스스로를 속국(屬國)이라 여겨왔다.
이를 사대주의 정책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엄청난 수난과 모멸을 당한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폭발하고 마침내 북벌론으로 이어졌다. 이 반감은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하면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1890년대에 서재필은 “영은문과 그 옆에 있는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재필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사진을 본떠 이를 참고하여 독립문의 조감도를 직접 스케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높이 14.28m, 폭 11.48m의 위용

독립문의 건립은 1890년대 초기에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들이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서재필은 1895년부터 독립문 건립을 위해 국민들에게 호소하면서 성금을 모금하였다.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을 서울로 영입하여 건축의 설계와 시공 등을 맡겼다. 토목과 건축공사는 우리나라 건축 기사인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공사 노역을 맡았다.

독립문의 시공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된 뒤에 시작되었다.

1년 만에 완공된 독립문은 높이 14.28m, 폭 11.48m의 거대한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섰다. 주여 건축 재료는 화강암 석재 1850개가 들어갔다.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오얏(자주) 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도 그대로 남은 부분이다.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하를 보냈다. 이때 현판 글씨를 쓴 김가진은 “정축년 삼전도의 수모와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굴욕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조선시대 제4대 세종 21년에 개설한 한강 나루인데, 도성 장안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곳으로 오늘날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 석촌 호수 남쪽이다.

병자호란 때 이곳에 수항단이라는 단을 쌓고 제16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굴욕의 현장이다. 항복을 받아낸 청 태종은 이곳에 높이 3.95m의 송덕비인 삼전도비를 세웠다.

이때 청나라에 대항하며 끝까지 항복하지 않던 저항 신하 홍익한, 오달제, 윤집 3명의 척화신(斥和臣)이 처형당하였다.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칭한다.

독립협회는 민중계몽단체

독립협회(独立協会)는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안경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박정양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조선과 대한제국의 시민사회단체이다. 초기에는 사교클럽 형식으로 출발하여 민중계몽단체, 정치단체 및 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그해 이어 7월 2일, 내부적으로는 민중 스스로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국임을 표방,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하였다.

독립협회의 참여자 수가 늘면서 각지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학생들에게 토론과 타협을 가르쳤다.

1897년부터는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였다. 1898년 10월 종로 사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정식으로 발족하고,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 안을 고종에게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민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던 서재필 등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 등이 참여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권, 민중의 정치 참여, 내정개혁 등을 주장하고 활동하였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 세력 인사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박영효, 유길준 등의 권고로 11년 만에 귀국했다.

독립협회 강령은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민권쟁취, 자주독립, 국권회복이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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