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6) - 순국열사 제사모신 초혼단 '장충단'



순절한 충신장병 제례봉행
1900년(광무 4년) 조선 제26대 고종은 남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을미사변으로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된 아내 명성황후 민비의 원혼이 클로즈업 되어 눈을 감았다.

고종은 원수부(元帥府)에 명하여 남소영 자리에 제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이하 여러 장병을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고종의 명에 따라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절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는 단을 조성하였다. 고종은 이 단을 장충단이라 명명하는 한편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매년 춘추로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장례원은 조선시대 말기 때 궁중의 모든 의식과 제례, 조의, 시호, 능원과 종실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궁내부 소속의 관청을 말한다.
장충단이 완공된 뒤 1900년 9월 첫 제사를 올렸다. 제사는 제례의식에 따라 근엄하게 치렀다.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을 쏘는 가운데 봉행되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이경호를 주신으로 봉안하고, 대관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함께 제사를 모셨다.

그러자 이듬해 1901년 육군법원장 백성기가 상소를 올렸다.

“창선(彰善)· 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리오! 임오군란에 희생된 영의정 이최응, 판서 김보현· 민겸호, 참판 민창식과 갑신정변 때에 희생된 찬성 민태호, 판서 조영하 ·민영직, 참판 윤태준 ·이조연, 중관(中官) 유재현 및 을미사변에 희생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종 임최수, 참령 이도철 등도 전사한 장병 못지않은 순국 충렬의 인사이니 마땅히 제향을 모셔야 합니다.”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이들도 함께 장충단에서 제향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 제향신위(奬忠壇 祭享神位)에 포함되고 제례봉향도 더욱 격상되었다.
당시 항일운동과 일본을 배척하다가 희생당한 인물들을 장충단에서 합동 제향을 올리게 되지 장병들이 크게 감격하고 용기가 백배하며 사기가 충천하였다. 일제의 잔악한 횡포가 극심함에 따라 일반들이 장충단을 바라보는 눈과 이에 대한 경모심도 더욱 커졌다.

이로써 항일 ·배일(排日)의 인물들을 장충단에 제향한 일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민들 사이에서 《한양가》가 널리 애창되었다. 이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장안에 울려 퍼진 노래였다. 《한양가》에는 당시의 시대성을 담은 구절이 있다.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네.”

장충단 건너편 동쪽 길목에는 장충단비가 서 있다. 이 비에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제27대 순종이 임금으로 등극하기 전 황태자 시절에 쓴 친필의 ‘奬忠壇’ 3자가 앞면에 새겨졌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지은 143자 찬문(撰文)으로 된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충정공 민영환은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뒤 예조, 병조, 형조판서에 이어 한성부윤 등을 역임했다. 일제가 국권을 찬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문무백관을 인솔하고 궁궐로 들어가 이를 반대하였으니 헌병들이 강제로 해산시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상소를 의논하던 중에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일제가 제례 금지시켜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역에서 피살되자 일제는 그의 추도회를 이곳 장충단에서 개최하였다. 이 추도회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대한 인물로 치켜세우는 동시에 그를 저격한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살인범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잔악한 일제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를 장충단에서 지낸 뒤 1910년 8월부터 장충단 제사를 봉행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폐사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아예 장충단 비석을 뽑아 숲 속에 버렸으며 기타 부속 건물들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장충단에서는 일제 강압으로 제사가 중지되고, 운동회 등이 개최되는 장소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충단 파괴는 조선총독부가 일제 강압기인 1919년 장충단을 공원조성 대상지로 선정하면서 더욱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는 장충단 일대 29만 7000㎡를 장충단 공원으로 바꾸어 벚꽃을 심고 공원 시설을 설치하는 공사를 전개하였다.

'항일의 표상'을 위락의 공간으로 변경시키데 멈추지 않았다.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기리는 움직임을 드러내면서, 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의 거센 항의로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9년 말, 이토가 죽은 지 20주기가 되자 동상 건립 대신에 이토의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을 건립하려는 꼼수를 부렸다.
이렇게 하여 이곳 장충단에 1932년 ‘박문사(博文寺)’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과 육탄 삼용사의 동상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는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꾸며댄 일이다.

박문사를 지을 재목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앞세워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궁궐들을 마구 훼손하였다. 박문사 본당만 신축하였을 뿐, 나머지 부속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궁궐의 건물들을 뜯어와 옮겨 놓은 것이다.

조국 광복 후 우리 정부에서 육탄 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를 철거해버렸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장충단비(奬忠壇碑)는 손상되지 않았다. 이 비는 본래 영빈관 안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편으로 옮겼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인 수표교는 조선 500여 년 동안 종로 2가와 을지로 사이를 오가던 청계천 다리였는데,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에 이곳으로 옮겨져 연못 위에 설치한 것이다.

박문사의 위치는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이다. 그 부지를 삼성그룹이 매입하고, 한국을 찾아오는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주로 숙박하는 곳으로 3층 높이의 영빈관을 만들었다. 영빈관은 고색창연한 한국의 전통적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영빈관 옆에는 신라 천년의 맥이 흐르는 신라호텔을 신축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스타일의 인테리어로 장식한 18층의 현대식 호텔이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 공원 경내에는 여러 공원 시설이 들어섰다. 분수대, 놀이터, 테니스장, 광장 등이 들어서고,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인 사명대사 동상, 순국열사 유관순 동상, 석호정, 자유센터,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등이 건립되어 문화 레저 관광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소나무 숲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수려한 장충단 공원은 서울시민의 휴식처로도 인기가 높다.

전설의 장충체육관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종합체육관으로 대한민국 체육사의 한 획을 장식한 장충체육관은 본래 1950년대 말 육군체육관으로 건립된 유서 깊은 곳이다.
국제 규모의 실내 체육관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1963년 2월 1일 개관되었고, 2015년에 전면 개조하였다.

돔식 경기장인 장충체육관은 연건평 8870㎡에 건축 면적 5400㎡, 3층 높이에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 체육관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개관 이래 농구, 배구, 핸드볼 등의 구기종목과, 복싱, 역도, 레슬링 등의 개인기의 경기들이 펼쳐지면서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한 곳이다.

또한 각종 연예행사 및 기념식과 더불어 신군부 시절에는 대통령 간접선거도 실시되어 ‘체육관 대통령 탄생’이라는 정치사의 일면을 남기기도 하였다.
88서울 올림픽 때에는 유도와 태권도 경기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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