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8) - 자주국방의 군사기지 '용산 병영'

둔지산 보루의 전설
서울 남산의 지맥이 한강으로 뻗어 내리면서 용산구 이태원동과 용산동으로 이어지는 곳,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로부터 동쪽으로 완만하게 구릉진 야산이 둔지산이다. 이곳에 도성을 지키는 군사의 병영을 설치한 것이다.
둔지산(屯芝山)은 정상부의 높이가 해발 65m이고 구릉지의 높이는 약 48m 정도이다. 조선시대에는 군량을 조달하기 위한 둔전(屯田)을 두었는데 그 이름에서 유래하여 둔지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둔(屯)은 옛날 군사의 주둔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 둔지산에는 무운(武運)을 비는 사당 무후묘(武侯廟)가 근대까지 있었다. 이 묘당에는 중국의 장군인 관우와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명장 김유신 등을 함께 봉안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둔지산 병영을 정비 구축하면서 무후묘도 보광동으로 옮겼다.

둔지산 병영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 수군 방어의 전략적 요지로 꼽았다. 서해 바다에서 한강을 타고 들어오는 외국 병선들을 둔지산에서 척결하였기 때문이다.

옛 육군본부 북쪽 수도여고 앞에는 너른 들판이었고 그곳에 커다란 군자감이 있었는데 그에 얽힌 전설이 이색적이다. 그 전설은 조선 제24대 헌종 때에 학자 홍직필의 문집 《매산집》에 기록된 것이다.

“조선 초기 이곳에다 군수 창고를 지으려고 정지작업을 하는데 석관이 하나 발굴되어 살펴보니 석관 위에 ‘여기는 창고를 세울 땅이니 나를 한강 밤섬으로 이장하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그대로 하였는데 그 뒤에 홍수에 밤섬이 물에 잠기고 이장한 무덤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없어졌다.”

이 석관은 삼국시대 사람의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둔지산 일대의 토질이 좋아 조선시대 벽돌을 생산하였고 명동성당을 건축하는 벽돌도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둔지산 동남쪽에는 조선시대 때 나라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있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남쪽으로 완만한 평지에 반만년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미술, 유물과 유적, 민속자료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용산 가족공원이 자리를 잡았고, 북쪽에는 한국의 전쟁사를 담아놓은 전쟁기념관이 들어섰다.
600년간 전략적 요충지
서울 용산 병영 기지가 시민으로 품으로 600여 년 만에 돌아온다. 용산 삼각지 동쪽 둔지산은 조선 초기에 도성 방어를 맡은 군사기지가 된 이래 일제 강점기 시대, 미군정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근까지 국방부와 육군본부, 주한 미8군 등의 병영 기지로 수도 방위에 큰 역할을 해왔다.

이곳에 있던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이 연전에 이전하였고, 주한 미8군도 수도권 밖으로 이전절차를 밟고 있음에 따른 것이다.

용산은 자동차가 없던 시절 한강을 통해 서울에 상륙하기 쉽고 남산과도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로 꼽혀왔다. 이 같은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오랫동안 외국군 주둔지라는 멍에를 썼다.13세기 말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이 용산을 병참기지로 삼았고,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왜군 선발대 제1진이 한양 도성으로 들어와 둥지를 틀고 명나라 군대와 화친교섭을 벌였다.

임오군란 때에는 군란 진압을 핑계로 들어온 청나라의 오장경 부대 3000명이 둔지산에 임시 병영본부를 세우고 주둔하였다. 또한 그때 흥선대원군을 청나라 보정부로 납치해 간 부대도 바로 오장경 부대였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때에는 일본군 여단사령부가 이곳에 작전본부를 설치함으로써 군사적 사령부의 터전으로 바뀌었다. 그때 일본군은 전쟁을 핑계로 이곳에 둥지를 틀고 군사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둔지산을 왜둔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08년에는 일제가 이 지역에 조선군사령부를 설립하고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조선군사령부는 일본 군대를 위장하는 술수였다.

조국 광복 이후에는 육군본부와 국방부, 유엔군사령부가 둔지산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용산에 터를 잡았다.

미군 24사단이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하면서 이곳에 머물렀다. 미군은 미·소 합의에 따라 1949년 한국을 일시 떠났으나 6·25전쟁 발발로 다시 유엔군의 중심이 돼 돌아왔고, 그 이후 이곳이 주한 미군의 본영이 됐다.

1955년에는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사가 용산으로 옮겨왔다. 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가 이곳에서 창설되면서 양국 연합방위체제의 ‘심장부’ 역할을 해왔다.

용산 삼각지 일대의 옛 지명은 기름진 들판이라는 뜻의 부원(富原)이었다. 한강이 실어 나르는 퇴적물이 굽어 흐르는 강변에 쌓이고 쌓인 땅이라 기름지고 비옥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본래 고려 때는 과주현이라 하여 지금의 과천시에 속했고, 조선 태조 때에는 고봉현이라 하여 지금의 고양시 땅이었다.

전승되어 내려오는 ‘용산 8경’이 있었는데, 청계산의 아침 구름, 관악산의 석양 노을, 만천의 게 잡는 불, 동작으로 돌아오는 돛단 배, 율도에 지는 해, 흑석으로 돌아가는 스님, 노량 변의 행인들, 사촌(沙村) 보래사장의 저녁 빗줄기가 그것이다.

이 8경 가운데 마지막인 사촌이 바로 용산 삼각지 일대로부터 제1한강교인 인도교와 천주교도 처형장으로 악명을 남긴 새남터, 지금은 천주교 성지로 유명한 사평 남쪽 가장자리에 이르는 벌판인 이촌동 지역인데, 그때는 드넓은 모래사장이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1392년 이후 1900년대 전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50~60여 채의 오두막집 민가가 옹기종기 있었다고 전한다.

수도 방어기지 주한 미8군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8군은 미국 육군의 최고 단위 부대를 일컫는 말이다. 6.25전쟁 이후 한국에 파견된 모든 미군 육군은 미8군에 소속되어 있다. 현재 예하에 증강된 미 육군 1개 사단과 기타의 지원부대 등을 두고 있다.

이 부대의 성격은 군사적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매우 특수하다. 그래서 미8군 사령관은 한미 연합군 사령관, 주한 미국군 통합군 사령관, 태평양 육군 사령관, 유엔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다.

특히 한미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 지침에 따라 주한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행사하고 주한 미국군 사령관으로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하에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육해공군 부대를 지휘한다.

태평양 육군 사령관으로서는 태평양 지역에 있는 모든 미 육군을 지휘하고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유엔의 감독을 받는다.

이처럼 유서 깊은 미8군에서 지난 7월 7일 미 육군 사상 첫 동성애자 여성 준장 태미 스미스가 미8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화제가 되었다.

주변엔 외국인 타운
조선시대에는 남산 남쪽에 이태원을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 먼 길을 이동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숙소였다.

이태원 관리소 명칭은 출장하는 관리에게 숙식과 마필을 제공하던 역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설에는 그 일대에 배나무가 많아 이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뒤에 용산을 외국인의 주거지로 허용했다. 1884년 10월(고종 21년)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한 것이 그 시초이다.

외국인의 거주로 허용되고 개시장이 열리자 이태원과 원효로 일대를 중심으로 프랑스, 중국, 일본, 미국 등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들이 가져온 이질적인 경제, 종교, 문화를 수렴하고 확산하는 거점이 되었다.

1907년 이태원 주민들을 경기도 고양 땅으로 이주시키고 이곳을 개발하여 외국인 전용 주거지를 확장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이태원 인근에 미8군 사령부가 들어서고 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이태원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락 지대로 번창하였다. 그래서 주변에는 외국인 타운으로 각광을 받았다.

한 걸음 더 발전하여 삼각지 로터리에서 이태원동으로 이르는 너비 30m, 길이 3km의 이태원로를 중심으로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쇼핑 타운으로 번창하여 서울의 이방지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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