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19) - 한양도성 방어시설 돌담길 17km '서울성곽'


조선 초기에 쌓은 산성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한양 천도에 앞서 궁궐과 종묘 짓기, 그리고 성곽 쌓기부터 했다. 태조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4년이 흐른 1395년 9월, 책사 정도전(鄭道傳)에게 새로운 도성을 조성하라고 명하였다.

정도전은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 지형을 살피고 4개의 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쌓기로 하고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하고 설계한 뒤 이듬해 정월 착수하였다.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무려 11만 8000명, 4개 구간으로 나누고 각 공사 현장마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 등 12명씩을 한 조로 편성하여 명하고 공사를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는 관직과 군명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는 세심함도 보였다. 그 명판 주춧돌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사용하되 기초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일부 지역은 석재 대신에 흙으로 쌓은 토축 성곽으로 연결하였다.

봄여름 내내 공사를 강행하여 가을에 구불구불 이어진 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그렇게 하여 도심 속의 산허리를 이은 돌담길 17㎞를 쌓아 도성 방어용 성곽으로 축성한 것이다.

4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이며,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다만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네 글자로 하였다. 이들 각 대문의 명칭은 음양이기(二氣)와 생장소멸의 천지변화와 재복길흉을 점지하는 오행설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보수와 개축으로 보존
제4대 왕으로 즉위한 세종이 성곽에 대한 보수 계획을 세우고 1422년(세종 4년) 토축 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었다. 석재 길이도 가로 세로 2 대 1 비율의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았다. 여장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제5대 문종 때인 1451년 1월부터 경기· 충청의 수군 3000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수축하였으며, 제9대 성종 때인 1479년 남대문인 숭례문을 중수하였다. 제14대 선조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의정 이양원을 도성 수비대장에 임명하 고,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군사력과 병비가 허술하여 왜적을 격퇴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선조는 조정 신료들은 대동하고 한양 도성을 떠나 북으로 피란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성곽에 왜루를 쌓고 왜군의 망루로 삼았다.이듬해에 한양을 수복한 조선 관군은 왜루를 철거하고 왜군이 파손한 부분을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그 뒤 병자호란 때도 조선은 한양을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란함으로써 도성을 방어하지 못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제19대 숙종 때인 1704년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착수하여 5년에 걸쳐 둘레 9975보, 성첩 7081개의 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이후 제21대 영조 때 부분 보수를 거쳤다. 제26대 고종 6년 1869년에 동대문인 흥인지문을 개축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경성시 구역 개수계획’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흥인지문· 숭례문· 숙청문· 광희문· 창의문 등의 성문과 암문· 수문· 여장· 옹성 등의 방어시설이 파손되고 일부만 남았다.

조국 광복 이후인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한산의 석축을 보수하고,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공사를 하였다. 창의문~숙정문에 이르는 삼청지구 복원에 이어 2012년 9월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 구간까지의 복원작업을 완료하였다.

2013년 5월 4일 남대문인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 측 광장 구간 성벽 복원까지 마무리하였으며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이 추가로 복원되었다.

이를 계기로 2012년 11월 23일, 서울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다. 잠정 목록에 오름에 따라 1년 뒤부터 세계유산 등재신청 자격이 부여되었다.

한양은 514년(1396~1910년)간 조선왕조의 수도였고 일제 강점기 기간을 거쳐 대한민국 수도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6개 구간의 탐방길 조성
서울시는 한양 도성의 탐방 코스를 백악 구간, 낙산 구간, 흥인지문 구간, 남산(목멱산) 구간, 숭례문 구간, 인왕산 구간 등의 6개 구간으로 나누었다.

백악 구간에는 창의문부터 와룡공원까지로 1968년 1.21 사태가 일어난 뒤 청와대의 보안을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가 1993년 창의문이 개방되었다.

그 뒤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촛대바위까지 개방하고 2007년 4월 5일 나머지 구간인 촛대바위에서 창의문까지도 공개되었다. 창의문에서 말바위까지 구간은 하절기인 3월~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동절기인 11월~다음해 2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을 제한한다. 신분증을 지참하여야 출입할 수 있다.

낙산 구간에는 혜화문부터 낙산 정상까지 성곽 1037m와 여장 1033m 거리를 삼선 지구로 정하여 복원하였다. 낙산 북쪽 창경궁로와 연결되는 부분에 7m 고도차를 극복하는 계단을 포함하여 67m 구간이 추가로 개통되었다. 낙산공원 정상 일대에는 군 시설, 배드민턴장, 노인정이 성곽과 맞대고 있다.

낙산 정상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성곽· 여장 1051m 거리를 동숭 지구로 지정하여, 1980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8월 1일까지 543m의 성곽을 보수하였고, 1981년 9월 19일부터 이듬해 6월 16일까지 잔여 구간인 성곽 508m와 여장 520.5m 거리를 복원하면서 2개의 암문을 개설하였다.

흥인지문 구간에는 오간수문은 기단부가 발굴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았고, 축소 모형을 오간수교 옆에 만들어 놓았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기 위한 발굴 조사 중에 멸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간수문과 일대 성곽이 드러났다.

이간수문과 치성 1개를 포함하여 발굴된 142m를 복원하고, 멸실된 123m는 돌을 쌓아 성곽임을 드러내 공개하였다.

퇴계로 347의 건물 오른쪽에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광희문 남쪽 성곽은 광희 지구로 지정하여 여장을 복원하였다. 광희문은 도성 장안
사람들이 죽어서 시체로 나가던 통로로 흔히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고 불렀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도성 안의 사람들이 죽으면 그 시체를 반드시 남소문인 광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내도록 정했다. 그래서 이 문을 황천문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당시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한양 가거든 수구문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고 하는데, 그 연유는 이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탓이었다.

장충단로 8길에는 성곽 일부가 담장으로 되어 있거나 개인 저택 마당 아래에 묻혀 있다.

남산인 목멱산 구간에는 장충체육관~신라호텔~서울클럽을 지나는 성곽이 이어지는데 그 안쪽 탐방로 1090m가 개방되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남산 동쪽까지 1053m 거리를 장충 지구로 지정하고, 남산 일대 1639m는 남산 지구로 지정하여, 성벽과 여장을 복원하였다. 백범광장 부근 239m의 성곽과 지형이 복원되었다.

숭례문 구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서쪽 담장에서 발굴된 한양 도성 주초 바로 위에 여장이 복원되지 않았다. 복원된 성곽은 세종대로 9길 41의 빌딩 담장으로 이어지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에는 '서대문 성벽의 옛터'라는 표지석 뒤로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정동길 8의 한성교회 안쪽 아카시아 나무 담장 밑으로 성 돌이 보인다. 이는 성곽의 진행 방향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 성곽이 헐린 뒤에 옮겨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산 구간에는 서울시복지재단 서쪽 담장 아래에 성곽이 남아 있다. 인왕산을 오르는 구간은 1.21 사태 이후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다시 개방하고 있다.

돈의문 북쪽에서 창의문까지의 1626m 구간을 청운 지구로 지정하여 복원하였다. 1996년에는 국사당과 치마바위 사이의 56m 구간을, 이듬해에도 같은 위치의 성곽 중 45m를 보수하였다. 인왕산 정상 서쪽의 283m 구간을 복원하고 인왕산 동쪽의 일부와 범바위 일대 치성 등이 차례로 복원되었다.

도성 따라가며 풍광 즐겨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였는데, 이를 순성(巡城)이라 하였다.

'한경지략'에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린다’고 기록하였다.
프랑스 사람이 '잘 걷고 산을 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산책길이었다. 특히 좋은 계절에 소나무와 꽃이 우거진 남산비탈을 따라갈 때, 흠잡을 데 없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구석구석을 즐길 만한 곳'이라고 경탄을 쏟아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대의 순성 놀이 행사는 서울특별시가 시민단체와 함께 매년 9~10월 열고 있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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