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학교 교과서에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와 병기토록 하는 법안이 지난 1월 동 주 의회 상원 통과에 이어 이달 6일 하원에서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됨으로써 동 법안은 주법(州法)으로 공포되어 올 7월부터 효력을 발할 것이라 합니다. 일본은 이 법안의 통과를 막으려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백방으로 힘을 쏟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였습니다. 동해 이름의 국제적 통용을 위한 우리의 노력에 큰 획을 긋는 이번 쾌거는 재미 동포들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이었습니다. 동해를 교과서에 병기토록 하는 버지니아 주법이 앞으로 미국의 다른 주에까지 영향을 줄 것으로 보면 이 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 간 정부 차원의 외교전과 아울러 일반 국민까지 가세한 홍보전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바다 이름이 국제적인 이슈가 된 것은 1992년부터입니다. 당시 외교부 실무를 맡고 있던 필자는 유엔이 발간한 문서에 “두만강은 일본해로 흘러들어간다”라든가 “나진/선봉지역이 개발되면 이 지역은 일본해와 유럽 대륙을 잇는 교량이 될” 것이란 문구를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국민에게 두만강은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당연한데 동해가 사라지고 일본해가 이를 대치하고 있는 형상에 동료들과 함께 크게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엔에 항의 서한을 보냈더니 유엔은 ‘일본해(Sea of Japan)’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리적 명칭이므로 그렇게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아무리 유엔이 권위 있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이건 도저히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 이름이 우리의 영토나 영해에 대한 주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로부터 동해로 불러오던 바다가 ‘일본의 바다’로 불린다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일본해’가 통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해 바다 이름 문제를 제기하여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실을 보게 되면 그동안 일본에 뒤지면서도 안간힘을 쓰며 따라잡으려 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한편 일제 강점기 이래 오랜 세월 쌓여온 대일본 열등의식을 불식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해 바다가 오랫동안 국제 해도 상으로 한국해(Mare Corea) 또는 동해(Mare Oriental)로 표기되어 오다가 일본해로 통용된 것은 국제적으로 일본의 세력이 확장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급격히 커지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국제수로기구(IHO)가 제작한 ‘해양의 경계(The Limits of Oceans and Seas)’라는 책자에서 ‘일본해(Japan Sea)’로 표기되고부터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 상태에 있지만 않았더라도 일본해란 이름은 우리의 항의에 부딪쳐 채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에 바빠 동해 바다의 국제적인 표기 문제에는 그리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민간에서는 동해 바다란 이름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국제적인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유엔 문서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 것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바다 이름이란 결국 더 많이 알려지면 국제적으로 더 많이 통용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계기가 바로 5년마다 열리는 유엔회의로서 1992년 여름으로 예정된 유엔지명표준화 회의(UNCSGN)였습니다. 이 회의에 동해/일본해 명칭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어서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면 동해라는 이름이 일본해의 대안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고 이런 노력을 꾸준해 해나가면 동해가 일본해를 완전히 대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본해와 함께 쓰일 수는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내부적인 우여곡절이 있긴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동해 문제가 그 해에 유엔지명표준화 회의에 제기되었는데 우여곡절이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상대방은 ‘일본해’라 하는데 왜 우리는 당당하게 ‘한국해’란 이름으로 나가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었고, 둘째, 막중한 한일 관계를 고려하여 이 문제의 제기를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는 의견이 득세하여 자칫하면 유엔에서의 문제 제기 자체가 유산될 뻔했다는 것입니다. 후자의 문제는 북한이 나름대로 유엔에 동해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이 알려짐으로써 우리로서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을 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명칭인 동해, 즉 ‘East Sea’ 대신 과거에 있다가 사라진 한국해, 즉 ‘Sea of Korea’를 주장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바다 이름에 특정 국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대안으로 ‘한국해’를 주장한다면 자가당착이 되어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에는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국제 뉴스에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 사례가 나오기만 하면 정부를 질타하기 일쑤지만 돌이켜보면 일본해 표기 일색이던 국제사회의 표기 관행에서 20년 남짓한 기간에 동해(East Sea)란 이름이 이만큼이라도 자리를 찾게 된 것은 결코 작지 않은 성과라 봅니다.

한편 이런 추세에 대응하여 일본은 영토 문제와 함께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에서도 더 밀리지 않겠다는 자세로 매우 공세적인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 나라 사이의 바다 이름 문제도 독도 문제처럼 역사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그들의 침략적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동해/일본해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 유산을 불식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국제사회에서 ‘동해’ 이름이 더욱 많이 쓰여 각국의 지도, 교과서, 각종 문서, 신문방송 등에서 일본해와 병기되도록 또는 경우에 따라 ‘동해’ 이름이 단독으로 표기되도록 정부와 국민이 계속적인 노력을 펼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 버지니아 주 법안 통과에서처럼 우리 재미동포의 발언권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독도 문제에도 미국이 나서도록 하는 데에 우리 동포의 힘을 보태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제주 소재 유엔국제훈련센터(UNITAR)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외국인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외국인거주환경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묘미를 찾는다.

[자유칼럼그룹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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