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 독살설에 분노한 백성들
파고다 공원의 함성, 한양을 넘어 전국에 메아리

민족의 항쟁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급서로 불거진 민족의 항쟁이었다. 고종의 서거는 참으로 갑작스러운 비보(悲報) 중의 비보였다.

고종은 1907년 이후 12년 동안 일제의 엄격한 통제 아래 서울 덕수궁에 갇혀 생활하는 처지였다.

대한제국의 국정 통치권을 전혀 시행할 수 없고, 국가의 국정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명칭만 황제였을 뿐 덕수궁에 연금된 상태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고종을 대한제국 황제로 생각하고 황제의 옥체 건강과 만수무강을 축원해왔다.

고종이 살아있는 한 나라의 국운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일제 강점의 쇠사슬로부터 벗어나 독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차제에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원인 모를 급서 소식이 전해지자, 운명적 자연사의 서거가 아니라 독살(毒殺)되었다는 설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고종은 일제 간계로 독살되었다!”
“일본인의 사주로 식혜에 독약을 넣어 야식으로 올렸다.”

고종의 사인(死因)을 둘러싸고 분노의 함성이 장안에 파도쳤다. 한양 거리는 하루아침에 죽음의 도시, 분노의 거리로 돌변하였다. 육조거리는 완전 철시되고 덕수궁 정문인 대안문[大安門 ; 뒤에 대한문(大韓門)으로 개칭] 앞에는 통곡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백성들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지사였다. 나라를 잃은 지 10년,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나라 잃은 원통함과 암흑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선비 학자들은 언로와 직필을 차단당한 채 음지로 밀려나거나 해외로 망명을 떠났고, 학생들은 군복 차람에 칼 차고 교단에 선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 말고 글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어와 일본 글자로 일본 역사를 배웠다.

상인들은 상권을 빼앗기고 농민들은 토지를 강탈당하고 빈손으로 만주벌판으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런 정세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에서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모든 식민지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준수하고 이 결의에 따라 독립하여야 한다는 것을 합의하였다. 이 소식이 국내로 날아들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해외 독립 운동가들이 조국독립을 외치면서 1919년 2월 초 독립선언서를 먼저 발표하였다. 이를 1919년 무오년(戊午年) 독립선언이라고 일컫는다.
“아!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武力)이여! 섬나라 왜는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라. 그리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 지어다!”

해외에서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국가의 독립과 민중의 자유, 동양의 평화 회복을 세계만방을 향해 부르짖었다. 이런 진운에 따라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 600여명이 동경 한국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대한제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하고 김도연, 이종근, 송기백 등 11명의 대표가 서명하였다.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세계만방에 독립을 선언하노라!”

일본 땅 한복판에서 거침없이 외쳐댔다.

3.1독립만세운동

섬나라 왜국 땅, 일본 동경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외쳤다는 뉴스는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로 날아들었다.

“조선의 아들딸들이 적국의 심장부에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이런 차제에 우리가 어찌 앉아 있으랴!”

2월 상순,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오세창, 최린, 송진우, 현상윤 등 우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송진우와 최남선은 당시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만나 민족 대표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불응하자 대신들을 민족대표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계 2명 등으로 민족 대표 33인을 극비리에 구성하고 손병희를 민족 총대표로 선정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고 한용운이 수정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하여 독립선언서를 완성하였다. 2월 27일 비밀리에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민족 대표 33인은 2월 28일 재동 손병희 자택에 모여 마지막 점검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파고다 공원(탑골공원)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일 것이므로 혼란이 우려되고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이 염려되어 거사일정을 수정하였다.

“거사는 3월 1일 정오 거행한다. 독립선언서 낭독은 인사동 태화관에서 하고,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한다!”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거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마침 고종의 인산(因山 ; 국장) 장례식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이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선비와 학자들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거사에 앞서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 배포와 운동의 방법, 날짜 등을 전달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문, 미국 대통령과 프랑스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최남선이 기초하고 인쇄비용은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는 종로 이북은 불교계 학생들이 맡고, 종로 이남은 기독교 학생들이, 남대문 밖은 천도교 학생들이 맡았다. 또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문과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였다.

3월 1일 시민과 학생들이 아침부터 거리로 나와 4000~5000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이날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소리가 울리자 학생 대표인 정재용이 파고다 공원 팔각정 연단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거사의 함성이 한양 장안에 울려 퍼졌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에 고(誥)하야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모자를 흔들면서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천지를 진동하는 이 함성에 일제는 허겁지겁 갈팡질팡하면서 발광적으로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들어간 시민 학생 군중들은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 황제의 빈전(殯殿)을 향하여 삼례(三禮)를 올리고 대열을 나누어 1대는 정동 미국 영사관으로 향하고, 또 1대는 남대문을 지나 왜성대 총독부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시가행진을 진행하였다. 그때 총독부를 지키던 일제 기마병과 왜병들이 성난 이리떼처럼 덤벼들면서 난투전으로 돌변하였다.

이날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오후 6시 끝냈다. 그러나 이날 밤 8시 마포에서 1000여명이 다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밤 11시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 500여명이 또 다시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1일 하루 동안 서울을 비롯하여 개성, 평양, 진남포, 선천, 안주, 의주, 원산, 함흥, 대구, 황주, 수안, 곡산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3월 2일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이 이끈 거사

민족대표 33인의 거사는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간단한 축배를 들었다. 그 때 태화관 주인은 “지금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고 알리라는 33인 대표의 말에 따라 조선총독부에 전화로 통보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가운데 지방에 있던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는 불참하여 실제로 참석한 인사는 29명이었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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