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잔학한 폭정에 항거
2천만 동포, 전국에서 대한독립만세 함성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국내에서는 일본 강점에 분노한 항일투쟁의 열기가 높아지고, 해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는 모든 민족들이 제각각 독립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민족의 지배를 계속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라는 선언이었다. 이 제의가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되자 핀란드, 라트비아 등 유럽의 약소국가들이 독립을 천명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의 애국지사들은 독립의지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애국지사들은 우리 민족의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도록 하였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외친 뉴스가 들어오자 종교인, 지식인, 학생 등이 전국적으로 독립 투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때 고종 황제가 급서하고 그 사인(死因)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떠돌아 온 백성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고종의 인산(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이때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올 것을 감안하여 독립선언을 3월 1일 정오에 거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3.1독립만세 선언으로 발전되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애국지사들은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하는 한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 보창로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김신부로 22호(현재의 서금 2로 22호)에서 먼저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다.
조계는 중국의 개항 지역으로 외국인들이 그들의 거류 지구 안에 경찰 및 행정을 관리하던 곳을 말한다.
독립운동의 분수령

3.1독립만세 선언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횃불을 지핀 역사적인 날로 우리 민족에게 독립과 자립, 그리고 희망을 안겨주고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독립운동의 분수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슬기와 지혜, 용기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전기였다.

3.1독립운동은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전국에서 활기차게 전개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8월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풀어 평화적 비폭력으로 독립운동을 펴는 백성들을 총칼로 진압하였다.

일제에 무자비한 폭력으로 엄청난 피해자가 발생하자 독립군, 광복군 등의 조직을 통해 일제 탄압에 폭력으로 맞서는 새로운 항쟁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일제는 왜병의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武斷統治)가 실패했음을 인식하고 ‘문화정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새로운 통치방법을 폈다.

문화통치의 음모

일본 총독부의 ‘문화정치’는 한국 국민을 슬슬 꾀어 자기들에게 순종하게 만들려는 교활한 회유 정책이었다. 3.1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뒤 우리 민족의 단결과 저항에 놀란 일제는 사이토오마코토를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전까지는 헌병 경찰을 앞세워 총칼과 협박으로 억눌러왔다. 그런 정책이 더 이상 먹혀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그들을 깨달은 것이다.

일제는 총칼 대신에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한국어와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 중심으로 교육을 강행하고 역사, 지리, 문화, 풍속들을 그들과 같은 맥락으로 희석시키려는 속임수였다.

그 주요 골자는 총독을 문관으로 임명하고 헌병 경찰 제도를 폐지하고 보통 경찰로 바꾸며 교육령을 개정하여 일본과 교육수준을 같게 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인이 경영하는 언론기관을 허가하였다. 이때 창간된 신문이 조선일보, 동아일보였다.

하지만 일제는 고등경찰이라는 것을 만들어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교육정책은 일본인 교장 중심으로 모두 교체하고 한국어 말살과 함께 철저한 황국식민을 강요하는 식민교육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와 같이 이름뿐이고 허울 좋은 문화정책은 한국인을 더욱 어렵게 하고 일본인처럼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철저한 탄압, 차별 대우로 우리 민족은 수난이 가속화되었다. 일제에 반항하고 항거하는 사람들은 무차별로 체포 구금되었다.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헌병 경찰시대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들의 야만성은 더욱 악랄해졌고 잔학성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학살된 한국인은 1923년대까지 무려 66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또 다시 대대적인 민족독립운동이 계획되었으나 사전 발각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 헌장을 채택하고 임시정부 부서를 조직하여 발표하였다. 당시 임시 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부장에 김규식, 법무총장에 이시영, 재무총장에 최재형, 군무총장에 이동휘,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이 선임되었다.

그 뒤 9월 11일 임시 헌법 전문과 본문 8장 58조에 달하는 제1차 개헌인 신헌법을 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내각을 개편하고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이동녕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재정의 곤란과 사상적인 대립 등으로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그때 러시아에서는 혁명에 성공하여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노동정부가 탄생되었다. 그 영향으로 상하이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적인 일파와 민족주의 계파가 혼재하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런 가운데 공산계는 자금 횡령 등으로 척결되고 민족 계파가 이끌어 나갔다.

3.1독립운동의 정신

“거룩할사 기꺼울사 3월 초하루, 서른 세분 이름 두어 독립선언서,
대한민국은 독립국, 민족은 자유라고 높이 외치던 3월 초하루,
탑골공원 3월 초하루 오후 2시, 벽력같은 대한독립만세 소리
2천만 대한 국민의 가슴 울려, 3천리 진동하던 3월 초하루.”

'독립신문'은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 1일, ‘3월 초하루’라는 시(詩)를 싣고 1919년 3월 1일 낭독한 독립선언서를 게재하였으며, 민족대표 손병희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녕의 얼굴 사진을 실었다.

이날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 거주하는 교포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3.1절 1주년을 경축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날 오전 10시 경축식을 거행한 가운데 이동휘 국무총리는 경축사를 통해 3.1독립정신을 다시 강조하면서 “독립선언 1주년이 되는 오늘까지 우리는 한 치의 땅도 광복하지 못하고 이 경축식을 해외 외국인의 집에서 거행하게 되니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고 오열하였다. 그리고 중대한 정책 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과거 1년간 오직 평화주의로만 운동을 수행하여 왔다. 이제부터는 방침을 바꾸어 최후의 1인까지 대한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싸워야 하고 싸우지 않겠다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하겠다. 우리는 태극기 이래에서 혈전을 단행하기로 하자.”

이날 오후 2시에는 장안사로 올림픽 대로에서 태극기를 든 교포 700여명이 모두가 감격하여 애국가를 제창하며 눈물을 흘렸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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