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병과 싸운 구국정신
독립군과 의병의 용감한 투쟁사 길이 빛나

독립군의 항일투쟁
3.1독립운동은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한 민족의 항일 투쟁인 동시에 혁명이었다. 3.1독립운동 이후 무장 항일 투쟁의 본거지는 국내가 아니라 국외, 만주 땅과 시베리아 연해주였다. 그런 연유는 일본의 강압적 탄압과 정보력으로 국내에서는 독립을 위한 무력 투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독립군과 의병군이 도처에서 일어나 왜병과 왜경들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무장 단체로는 평북 동암산을 근거로 무장 항쟁을 편 보합단, 평북의 천마산을 근거로 한 천마산 부대, 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 부대 등을 꼽는다.

국내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는 동삼성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맺고, 정보 교환, 식민 통치기관 파괴, 왜군과의 교전, 친일파 제거, 군자금 모금 등 무장 항일 투쟁 활동을 펼쳤다.

그 가운데서도 천마산 부대는 일제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로 인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동삼성에 설치된 광복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력 체계를 이루었다. 그 뒤 천마산 부대는 왜병의 집요한 반격으로 그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자 동삼성으로 이동하여 대한통의부대로 편입되었다.

무장 항쟁 중에는 애국지사들이 개별적으로 전개하였던 의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국외에서 조직된 항일 단체에 소속되어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들어와 왜경과 싸웠다.

그런 사례 가운데 김원봉 등이 조직한 의열단,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청산리-봉오동 대첩
1920년 여름, ‘백두산 호랑이’로 이름을 떨친 홍범도는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에서 왜병 1개 대대 병력을 섬멸하였다. 이를 봉오동 대승이라고 한다. 홍범도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대와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군대와 함께 왜병 대대를 기습 공격하여 통쾌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독립군이 만주 청산리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의 명장은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등이며, 이들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소속의 독립군이 왜병 2개 사단을 섬멸하고 거둔 승리였다.

이 전투는 왜병이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이름으로 2000여 병력이 진을 있는 독립군 부대를 행해 공격해오면서 벌어졌다. 왜병은 독립군을 협공한다는 작전 아래 함북 나남에 주둔해 있던 왜병 21사단은 북쪽에서 공격하고, 시베리아에 있던 왜병 19사단은 장고봉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북로군정서는 장백산으로 들어가려던 작전을 포기하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할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총사령관을 김좌진, 참모장을 나중소, 연성대장을 이범석이 맡아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마침내 대첩의 날이 다가왔다. 10월 18일 독립군은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우거진 숲속 가운데 유리한 지형을 골라 잠복한 뒤 제1중대는 김좌진이, 제2중대는 이범석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10월 20일 독립군 전위병은 왜병 기병대가 독립군이 매복한 곳 앞까지 들어오도록 유인한 뒤 일제히 기습 사격을 퍼부었다. 순간적으로 기습 공격을 받은 왜병은 5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즉시 이동을 시작, 이날 새벽 2시 40분까지 무려 160여리나 되는 먼 길을 강행군한 끝에 갑산에 도착함으로써 왜병의 포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여기서 김좌진과 이범석은 또 다른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천수평에 있는 왜병 기병대를 새벽에 습격하였다. 방심하고 휴식에 빠졌던 왜병 기병대 1200명은 손쓸 사이도 없이 몰살을 당해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 전투에서 왜병은 거의 전멸당하고 살아서 도망친 왜병은 겨우 4명뿐이었다.

이에 비해 독립군 희생자는 130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 전투에서 왜군 사단 사령부가 어랑촌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독립군은 곧바로 진군을 강행하여 전방인 마록구를 점령했다. 왜군이 1만 병력으로 총격을 하였고 독립군은 1000명으로 맞섰다.

전투는 대혈전이었다. 왜병의 포탄이 날아들어 김좌진은 군모가 날아가고 이범석은 장검이 두 동강났다. 기관총 총수들이 모두 부상을 당하자 기관총 대장 최인걸은 자기 몸을 기관포에 묶고 기관총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며 방어전을 폈다.

왜군은 1000여 명이 죽은 뒤 퇴각하고 독립군 1개 소대는 40명이 전원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 그 뒤 보니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운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대승함으로써 독립 투쟁사에 빛나는 대첩인 동시에, 세계 전투 사상 보기 드문 승리를 거둔 혈전으로 기록되었다.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군
1920년대를 전후하여 동삼성에서는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비단, 대한총의부,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광정단, 태극단 등의 부대가 있었다.

연해주에서는 경비대, 신민단, 혈성단 등의 독립군 부대가 활동하였다.

미국에서는 국민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이 조직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광복군의 활동
광복군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중국 쓰촨성에서 1940년 조직한 군대를 일컫는다. 광복군사령부는 1930년 남만주에서 조직된 독립혁명군 통합단체와, 국내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만주로 건너간 대한의용군사의회, 한족회, 기원독립단, 청년단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만주교민통치기관 명칭을 광복군참리부로 고쳐 임시정부 내무부 직속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편성된 광복군은 중국 뤄양군관학교의 한국인 훈련반 출신과 중국 내에서 독립단 및 만주 독립군 출신 등을 합쳐 편성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일명 이청천으로 호칭)이, 참모장에 이범석이 선임되었으며, 군대는 3개 부대와 2개 공작대로 조직하였다.

광복군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의 6개 단(段)으로 하였다. 연합군과 함께 일본 군대를 상대로 싸운 광복군은 5000명에 이르렀다. 사이판 섬과 필리핀 등지의 왜병 부대로 끌려갔던 한국의 학병과 징병들이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에서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군과 왕정위군을 토벌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군 사령관에게 위임하였다가 1944년부터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의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이때 미군 공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의 원조 아래 일부 광복군이 낙하산 훈련을 받았다.

1945년에는 한미 합동작전으로 정진대를 편성하여 국내로 들어오는 진격 준비 중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국내 진입 작전은 진행되지 않았다.
광복 후 광복군 복원대라는 이름으로 미군 수송기편으로 귀국하였다.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조직의 바탕이 된 셈이다.

광복군과 달리 광복군총영이 남만주에서 왜병에 항거하여 싸웠으며, 국내에서는 1913년 광복단이라는 비밀 결사단이 조직되어 총독부 요인 암살 작전을 세우며 대항하였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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