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과서 문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서방 언론에서도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일본과의 갈등 양상이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인지 필자에게 전화나 메일로 논쟁의 사유를 물어보는 독일인 친구가 있습니다.

“독일 수상이 나치 전범자의 묘소를 참배했다면 이웃 나라 프랑스, 영국, 폴란드 국민이 손뼉을 칠까?”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고 하던 친구입니다. 요즘엔 그 친구가 독일 언론이 보는 분쟁 상황에 대한 자료를 필자에게 보내주곤 합니다. 특히 反일본, 親한국 자료면 ‘신바람이라도 난 듯’ 근거 자료를 보내줍니다.

바로 그 친구 내외가 필자를 만나러 온다고 합니다.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를 맞이할 생각에 필자의 마음은 들떠 있습니다. 며칠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시간을 함께 보낼 예정입니다.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삼성Leeum미술관, 국내 의료 기관(그 친구 내외는 모두 의사입니다), 동대문디자인센터, 교보문고 등의 명소를 보여줄 생각을 하니 흥이 절로 났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韓민족에게 저지른 잔혹한 만행을 볼 수 있는 기념관이 보고 싶다.” 친구가 만약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하지? 당혹스럽고 아찔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규탄하고 참회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쉽게 만날 수 있고, 침략을 당한 폴란드에는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는 아우슈비츠 (Auschwitz) 수용소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도 어렵지 않게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규탄하는 기념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 난징 대학살 기념관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1919년 3·1운동의 본거지인 탑골공원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맨손으로 저항하는 민중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며 진압한 역사의 흔적을 어디서 보여줄 수 있을까요?

3·1운동이 일어나고 몇 주 후인 4월 15일, 경기도 제암리에서는 이른바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이라는 큰 참변이 있었습니다. 세계 근현대사에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만행이었습니다.

중무장한 일본군은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양민을 강제로 교회 예배당 안에 몰아넣고 밖에서 출입문과 창문을 못질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켰습니다. 그런 후 교회 주변에 볏짚을 쌓고 계획적으로 양민을 불에 태워 죽이는 실로 경악할 만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안에 갇힌 가족을 구하려고 불길이 솟는 건물에 접근해 몸부림치는 아낙네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일이라 ‘세계 기독교 박해사’에도 기록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만행의 역사적 현장은 한마디로 초라하기만 할 뿐입니다. 말할 수 없이 빈약해서 부끄럽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역사적 현장에 외롭게 덜렁 서 있는 석조 추모탑은 찾는 이들에게 감흥조차 주지 못합니다. 비주얼(visual) 생활 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젊은 세대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서양 문화권에서 찾아오는 방문자들은 냉소 어린 실망만 할 게 분명합니다.

일제 만행의 역사적 현장인 제암리교회는 교회나 제암리 주민만의 유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만행 유적지’로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야 할 우리의 홀로코스트입니다.

따라서 국가 차원에서 제암리 역사 현장 일대를 성역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추모기념관도 세계인이 함께 참여한 국제 공모전을 통해 조성해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제 만행을 고발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역사적 교훈 현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2019년이면 참변 발생 100년이 됩니다. 서둘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위 내용은 2013년 2월 18일 자 국민일보에 게재한 필자의 칼럼 일부임을 밝혀둡니다.)

근래 일본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우경화 바람을 생각하면 더욱 절실해집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 방문객이 1년에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필자의 친구에게,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규탄하는 역사의 현장을 말보다는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평론가,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자유칼럼그룹 이성낙]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53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