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경술국치의 분통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 순종 장례 때 '대한독립만세'

6․ 10 만세운동
“오호! 오천년 역사의 최후 인산(因山 ; 순종 국장),
산하(山河)는 의구한데 왕손(王孫)은 하처귀(何處歸)!
봉도민(奉悼民) 20만 명, 연도 양측에 2만 학생 도열,
이화(李花)같이 소복한 예기(藝妓) 500명, 청량리 일대에서 봉도.”

1926년 6월 10일 신문들은 이렇게 대서특필하면서 순종의 국장을 애도하였다. 이날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인산(국장일)이었다.
순종의 인산에 때맞춰 우국지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대대적인 반일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면서 계획대로 거사하지 못하였다.

이때는 3.1독립운동 이후 학생 시대로 불릴 정도로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3.1독립정신을 이어받아 학생들의 단결과 조직 강화를 목적으로 민족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300여 차례에 걸쳐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단행하였고, 연극과 강연 등으로 민중 계몽을 전개하였다.

그런 학생들은 순종 인산 시각에 즈음하여 박두종 등이 이끄는 사직동계 학생들과 이동환 등이 중심이 된 통동계 고보학생이 항일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상여가 창덕궁에서 돈화문을 나오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2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총독부는 3.1운동 때 벌어졌던 시위가 또다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평양, 함흥, 나남 일대와 일본에 있는 왜병까지 5000 병력을 돈화문~종로~동대문~유릉으로 이어지는 연도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경은 시위를 이끈 학생 210여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였는데, 이 중 75명은 송치하고 주동 학생으로 11명을 기소하였다. 이 사건을 6.10 만세운동이라고 말한다.

계속되는 동맹휴학

6.10 만세운동은 그 동안 침체되었던 민족운동을 다시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수원고농(서울농대 전신) 학생들의 상록수 운동, 전남 나주역~광주 통학열차에서 일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이에 분개한 한국 남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을 난타한 집단 폭행사건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나주~광주 통학열차 사건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고 통합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사태 수습에 나선 왜경은 일본인 학생을 두둔하고 한국 학생들만 검거하였다. 이에 학생들의 반일 감정이 격화되고 그 여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 강점 하에서 일어난 최대의 학생독립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투쟁구호는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요구하고 죽음을 초월하는 항쟁의 의지를 밝힌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사실을 학생과 청년들에게 제시하는 카드로 내걸었다.

“장엄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고 분기하자! 싸우자 굳세게 싸우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청춘대중아! 죽음을 초월하여 싸우자, 만행의 일인학교인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이 운동의 본질이 이러한 것이었기에 광주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참여 학교는 초등하교 54, 중학교 136, 전문학교 4개교 등이며 참여 학생 수는 5만 4000명에 이르렀다. 그 당시 전국의 학생수가 10만 명도 안 되었으니, 결국 전국 학생 총수의 절반 이상이 참여한 셈이다.

이로 인해 1934년까지 무려 5년 동안 일제 식민지 교육을 중단하라는 항일 동맹휴학 운동으로 이어지고 또 다시 학생운동을 넘어선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 식민정책의 핵인 민족차별교육, 노예교육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으로 번졌다. 학생들의 반일 항거는 시험 백지동맹, 등교 거부 동맹휴학을 투쟁 방법으로 채택하였다. 이에 따른 동맹휴학은 1921년 33회 이후 1922년 57회, 1926년 72회 등으로 늘어났다. 놀라운 사실은 동맹휴학이 중-고교에서 일어났지만 초등학생들까지도 참여했다는 것이다.
순종의 승하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여 또 다시 백설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순종은 1907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뒤를 이어 융희 황제로 등극하였다.
순종은 고종왕비 민비 명성황후가 낳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즉위 3년 만에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는 경술국치를 당하여 16년 동안 창덕궁에 머물렀지만 사실상 연금 상태였다.
덕수궁에 유폐 당했던 아버지 광무 황제(고종)가 독살설을 남긴 채 승하한 뒤 7년 뒤에 순종마저 서거하였다.

“500년 종사의 최후 황상(皇上) 전 한국 융희 황제 이왕 전하 위독.”

“숙환인 위장병과 신장염 류머티즘 등의 환후 중에 계시던 이왕 전하께서 재위 4년 동안 모든 고초를 겪으셨다. 그러다가 을사늑약(한일합병) 후 무심한 세월을 보내시던 중 53세로 아주 위독하시었다.”

“창덕궁 전하 승하 26일 오전 6시 10분, 경복궁 서쪽 담 네 칸이 갑자기 무너졌다.”

당시의 신문들이 순종의 승하를 특보로 보도한 뉴스였다. 이때 흰 베로 만든 갓 백립(白笠) 값이 갑자기 폭등했다. 국상이 나면 검은 갓인 흑립(黑笠) 대신 백립을 쓰던 풍습 때문에 장안에 백립이 동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하이의 망명 공산단원인 권오술이 격문을 통해 순종을 모독하고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

“민중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자. 우리의 통곡, 복상(服喪)의 진의가 과연 정당한 일인가. 왕년의 융희 황제의 성덕과 효성을 아는 사람이 몇이며, 또 크게 감격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우리들 민중은 이것을 아는 사람, 감격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다만 그이가 우리의 군주로서 일본과 합병조약을 맺고 국가의 주권을 박탈당하고 2천만 생령을 왜놈의 노예가 되게 했다는 기억과 또 그이가 정신과 육체의 불구자였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순종은 불효자도 아니고 또 정신과 육체의 불구자도 아니었다. 그런 근거는 정인보가 황태자 영친왕(李垠)의 명을 받아 ‘유릉지문(裕陵誌文)’을 썼는데 총독부의 강압으로 이 글을 끝내 비석에 새기지 못했다.

이 지문을 보면 순종은 나이 21세에 어머니 명성황후를 일제의 칼날에 잃었으며 1919년 나이 45세에 부왕인 고종 역시 일제의 간계로 독살되었다. 순종은 운명하기 직전에 “나는 여기 살기에 진저리가 난다! 나는 너무 괴로워!”라고 한탄했다.

경술국치 망국의 한

순종은 생전에 독실하고 후덕한 인품이었고, 효행에 근본을 두었으며 학식이 풍부하여 조선왕조 최후의 왕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종은 치욕의 국권침탈 어전회의 때에 한일합병조약에 끝까지 서명날인하기를 거부한 당당한 황제였다. 그 당시 순종왕비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숨겼다가 일제의 앞잡이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긴 실화는 나무나 유명하다.

한일합병조약은 1910년 경술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친일 내각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강압으로 맺어진 조약이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 측에 넘기는 치욕적인 조약이다. 전문 8조로 된 조약은 비밀리에 체결한 뒤 1주일의 공백기를 거쳐 8월 29일 전격 발표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건국 519년 만에 멸망하고 조선총독부 시대로 접어들어 36년 동안 식민통치를 당한 것이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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