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에 짓밟힌 한반도
민족성 말살정책에 분노한 민중의 항거

일본의 침략과 만행
1930년대에 이르러 전 세계는 미국의 대공황에 휘둘렸다. 그 여파를 맞은 일본 군부는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는 술책을 꾸몄다. 그 술책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 9월 18일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연출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이 만주를 정벌하여 식민지로 삼기 위해 관동군을 투입하여 만주를 공격한 사건으로 ‘류자오거우 사건’이라고 하며, 흔히 ‘만주사변’ 또는 ‘9.18사건’이라고도 일컫는다.
1931년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 군부는 만주 땅이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여기며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자신들의 영향 밑에 있는 장쭤린을 앞세워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립국으로 만듦으로써 만주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중원대륙의 주권자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던 중에 장제스의 북벌군 공격을 받아 베이징을 철수하여 만주로 넘어왔다. 그러자 일본 군부는 그를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이 이동하는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인 뒤 만주 침략을 일으켰다. 이것이 만주철도 폭파사건이다.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일본군을 철저한 원수라며 장제스와 다시 합작하여 반일 태도를 나타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이 달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군부에게 만주 땅을 내주고 말았다.

만주를 장악한 일본은 청나라 최후의 황제 부의를 끌어다가 신정을 수도로 하는 만주국 괴뢰정부를 세웠다. 중국 국민정부가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고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만주국의 존재를 부인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이로 인해 만주 일대에서 독립활동을 하던 한국 독립군들은 중국 본토 또는 시베리아로 흩어져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40년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광복군으로 들어갔다.

일본의 황국신민 정책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한다.”

일본 총독부는 ‘황국신민의 맹세’라는 엉터리 지침을 만들어 초-중학생들에게 강요하였다. 앞의 것은 소학교(초등학생) 학생들의 맹세이고, 뒤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용 서사였다.

머리를 빡빡 깎인 한국인 학생들은 매일 아침 등교하여 교정에서 엉터리 맹세와 서사를 큰 소리로 외친 뒤 수업에 들어갔다.

특히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은 국방색 군복을 입고 다리에는 각반을 차게 하였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다니게 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는 한국인들을 일본 사람으로 만들어서 침략전쟁에 동원하려는 술책이었다.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본하게 따르도록 만들기 위한 교육정책이었다.

한국인들을 일본에 충성하는 신민으로 만들어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정신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독립심과 민족혼까지 말살하려는 졸책이었지만, 반만년 한국 역사에서 그런 수모는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마음속에서는 그럴수록 더욱 강열한 반항심이 생겨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남산에 일본 귀신을 섬기는 조선신궁을 차려 놓고 신사(神社) 참배도 강요하였다.

3.1운동 이후 신궁을 전국 곳곳에 꾸미고 신사 참배를 시켰다. 그 뒤 1936년부터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해 꼭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더구나 신사 주변에는 무궁화 대신 벚나무를 심어 일본처럼 꾸몄다. 이런 일을 주도한 자는 조선총독부 관리인 미나미 지로라는 일본인이었다.

미나미의 민족말살 정책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의례준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와 풍속을 말살하고 집집마다 일본 귀신을 섬기는 신주단지를 설치하라고 협박하였다.

이는 일본민족의 조상이라는 여신 아마테라스 신주단지를 한국의 각 가정에 꾸며놓고 아침저녁으로 절하라는 것이었다.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이 한국민족의 조상이 아니라는 억지를 부렸다. 이런 흉악한 정책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당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더욱 탄압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 총독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경제적인 탄압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상적인 탄압이 강화되면서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과 원한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민족의 문화와 혼을 없애기 위한 민족말살정책은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를 모두 전면 금지시키고 민족 언론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을 폐간시켰다.

이와 더불어 신사참배를 강화하고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로 실시하였다. 전쟁에 꼭 필요하나 절대 부족한 사람과 물자를 보충하기 위래 강제 지원병, 징용, 학병, 근로보국대, 여자정신대 등의 강제 징발과 식량, 유기그릇 등을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 갔다.

창씨개명은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한국 국민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 아래 한국인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하가하지 않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지 않은 사람을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여러 가지로 탄압하였다.

진주만 공격으로 자멸초래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자멸 수로 꼼수를 부렸다. 이날 새벽 3시, 일본 해군 함대가 미국 하와이 남쪽 진주만에 접근하여 미군의 극동 주력함대에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진주만은 태평양 지역을 관장하는 미 해군 기지로서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을 일본은 깊은 밤중에 선전포고도 없이 잠자리비행기와 장난감 같은 함대를 앞세워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이로써 제2처 세계대전의 일부인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기습공격한 일본이 우세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미 해군의 미드웨이 반격으로 일본은 전멸 당했다.

이때 일화로 일본 해군 장교가 잠수함을 타고 미군에 자폭 공격하지 않고 미군에 항복하였는데, 일본이 그 장교를 매국노로 여겨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계를 떠돌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이 전쟁은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전쟁이자,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무리수를 감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때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무기와 전함 등 장비 등에서 절대 약세한 일본이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강대국인 미국의 코를 건드렸던 것이다.

전세는 일본에게 불리하여 태평양 지역의 전투마다 계속 패배하고 일본 군사들이 전멸을 당하였지만, 그럴수록 일본군은 더욱 악랄하게 발악하였다. 가미카제라는 특수 공작대를 만들어 육탄전으로 미군의 진격에 맞섰지만 희생자만 늘어났다. 미 공군은 B-29 전투기로 타이완에 주둔한 일본군 진영을 폭격하고 일본 본토 상공을 비행하면서 군사기지를 집중 폭격하였다. 일본은 최후수단으로 고무풍선에 폭탄을 달아매어 띄워 보내는 등 갈팡질팡했다.

1945년 4월 독일 히틀러가 패배하여 자살한 뒤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일본이 홀로 발버둥을 쳐댔다.

미군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3일 후에 다시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또 투하하여 두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마침내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고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225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