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가 가속되면서 한국인의 반일 감정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혐한(嫌韓)정서와 한국인의 반일 감정 사이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가 겪게 되는 심적 고통이 크다는 토막 소식이 가끔 보도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일본 땅에서 사는 한국인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보통 한국 사람들이야 그저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 일이지만, 양국의 긴장 관계 속에 끼인 재일동포, 특히 일본 땅을 버릴 수 없는 현대판 디아스포라(민족이산)에게는 불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할 것입니다. 분쟁의 세계사를 깊이 살펴보고 재일동포의 형성과 수난 과정을 되돌아보면 그들이 느낄 불안감과 절망감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읽은 소설 한 권이 샌드위치 신세의 재일동포의 숙명을 새삼 조명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지인 한 분이 구소은이 지은 '검은 모래'라는 소설책을 우송하면서 꼭 읽어보기를 권했습니다.

요즘 소설 읽는 일에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있는 데다 책 표지에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그렇고 그런 시대의 아픔을 소재로 한 소설이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보내준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 반 의무적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그만 곧 스토리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소설은 제주도 우도 출신 해녀 가족의 4대에 걸친 일본 유민 생활사입니다. 100년에 걸친 가족사는 일본사회에서의 민족차별이라는 날줄과 민족분단이라는 씨줄로 엮여 있어 초기 재일동포의 신산한 삶과 후손들이 겪는 차별의 벽에 의한 고통과 절망이 마치 논픽션을 읽는 것처럼 피부에 와 닿습니다.

작가 구소은씨는 5년 전 일본 도쿄 남쪽 ‘미야케지마’라는 화산섬을 방문했다가 그곳이 출가 제주 해녀를 비롯해서 2백여 명의 한국인들이 정착했던 곳임을 발견하고 5년 동안에 걸쳐 취재해서 이를 소설로 썼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풀어내기 위해 작가는 긴 세월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우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발품이 많이 드는 탐사의 결과로 나온 소설이니 그 구성이 완벽한 허구인데도 불구하고 내 친척의 사연인 것처럼 절절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한일관계의 풍랑으로 더욱 이 소설의 서사성이 돋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은 50년 전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재일동포 북송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이었습니다. 재일동포 북송 반대를 외쳐대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그 진상을 오늘에야 깨닫게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동포 약 9만3천 명이 북송선을 탔습니다. 북한은 영광의 엑소더스로 선전했겠지만 그 결과는 비극의 행로였습니다. 북한은 선전용으로, 일본은 한국인을 내쫓아 버릴 요량으로 이 일을 추진했으니 인권적 차원에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일본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침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흥미로운 뉴스를 보았습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외할아버지 고경택(高京澤)의 허총(虛塚 시신이 없는 무덤)이 제주도에서 발견됐다는 신문 보도였습니다. 고경택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딸 고영희(김정은의 모친)를 낳았고, 가족이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보도로 그들의 친척이 제주도에 살고 있고, 그래서 북한에서 사망한 김정은 외할아버지의 허총이 제주도 가족 공동묘지에 생겼다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김정은의 외할아버지 허총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고영희 가족은 북송으로 행운을 잡았다고 할지 모르나 9만 여 명의 운명은 철저한 북한의 폐쇄성 속에서 폐기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인류보편의 인권적 차원에서 조명된다면, 전후처리 과정에서 재일 한국인 9만여 명을 교묘히 수용소 군도로 내쫓은 일본의 행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이 북송선을 타고 난 후 일본에 남은 그들의 친척은 물론 남한 내 친척들이 남몰래 겪어야 했던 고초를 생각하면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주변에 연결되어 있는 일화들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조국을 떠나 간도로,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로,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그리고 일본의 탄광과 군수공장으로 갔던 한국인들은 한국 근대사가 만들어낸 디아스포라입니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차별을 받으면서 고단함과 한(恨)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일동포는 민족차별과 남북분단의 와중에서 그 고통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가난한 삶에 지쳐서 점차 이들을 챙기지 못했고, 지금은 부유해진 우리의 상황이 오히려 그들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세계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전 이후 미국은 가장 큰 한국인 디아스포라 사회가 형성된 곳입니다. 경제발전에 따라 한국인은 아프리카에까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핍박받던 과거와는 다르게 그들은 자긍과 경제적 부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커뮤니티는 여전히 차별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디아스포라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분단이 가져온 상황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디아스포라의 형성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북한 동포의 유입입니다. 밖으로 나간 한국의 디아스포라 사회가 차별 없이 살아야 하는 것처럼, 한국에 정착한 수많은 디아스포라도 그들의 자유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의 사악한 차별의식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김수종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30여년 기자로 활동했다. 2005년 주필을 마지막으로 신문사 생활을 끝내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고 있다. 신문사 재직 중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환경책 '0.6도'와 '지구온난화의 부메랑(공저)'을 냈다.

[자유칼럼그룹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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