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국경일인 3·1절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3·1운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3·1운동은 먼저 일제강점기를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시작해 1945년 8월 15일까지 정확하게 34년 11개월 15일이므로 일제강점기간을 하루라도 줄여서 35년 또는 34년이라 해야 맞을 것 같은데 일제 치하 '36'년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는 대한민국 주권이 완전히 일본에 빼앗겨 없어진 시기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몽고가 침입하여 지배하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때는 왕이 존속이라도 하였으니 몽고 '간섭'기는 될지언정 '강점'기는 아니었습니다)
3·1운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반문해 봅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된 이후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고, 마침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퍼진 독살설은 조선 민중들이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또는 참여 대표 49인)이 작성한 '기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파함으로써 2달 넘게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독립을 선언하는 만세 시위가 전개된 사실,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자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며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19명이 총살되었고,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 예배당에 23명의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사실, 당시 17세의 유관순 열사가 천안 아우내 장터 등에서 극렬하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어 옥사한 사실 등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하여 단편적이고 치명적인 사건들 외에 전체 3·1운동의 전국적 규모나 희생자 현황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거나 알려고 하는 관심의 정도는 적은 것 같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기록에 의하면 3·1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7500여명(구속자 4만7000여 명)이고 3·1운동 참가 인원이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사실(당시 조선 인구 1758만 명), 천안이나 화성 외에도 경남 사천에서 73명, 대구에서 113명, 군산에서 53명 등 전국 232개 군·부 중 218개의 군·부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필자의 고향인 충남 청양에서도 커다란 만세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몇 해 되지 않습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홍범섭이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700여 명이 모여 정산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현장에서 일본군 발포로 권흥규 의사가 즉사하고 익일에는 의사의 시신을 운구하던 6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등 4일 간의 만세 운동 과정에서 11명이 순국하고 200여 명이 구금되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지방자체단체 차원의 추념 행사 필요성에 공감대를 얻어 매년 4월 '3·1만세운동 현창회'를 중심으로 기념식과 재현행사, 백일장 등을 개최한 지도 16년째입니다. 이번 3·1절을 계기로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내외뉴스통신/내외경제TV 상임고문 임정혁
- 현, 법무법인 산우 대표 변호사
- 법무연수원장

- 대검찰청 차장검사, 공안부장

- 서울고등검찰청 고등검사장, 형사부장

- 중앙고,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연수

- 제26회 사법시험(연수원 16기)합격, 제28회 행정고시 합격

- 황조․홍조․근정훈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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