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
“최선을 다 하라!” 짧은 인생, 영원한 업적

교육가로 독립운동 전개한 거인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안중근은 북받쳐 오르는 마음을 시로 달랬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큰 뜻을 품으니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
천하를 두루 보니 언제 뜻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차가우니 마음이 뜨겁구나.
분개함을 펴내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쥐 도적 이토야 네 목숨은 이제 끝이다.

독립운동을 펼치던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장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 3발을 쏴 모두 명중시켰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뤼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국운(國運)이 꺼져가는 길목에서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눈 깜짝할 사이에 저격한 불멸의 영웅이자 영원한 거인(巨人)이다.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아서 국민 모두가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몸을 국가와 민족에게 흔쾌히 바친 항일 애국독립 투사였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과 국민의 자유와 인권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나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 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룩하도록 일러다오.”

이 말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두 동생에게 당부한 유언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때 유언의 말미에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얼마나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하고 또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였는가를 더불어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쾌거는 “남의 나라를 빼앗고, 남의 나라 국민들을 학대하는 침략주의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하늘의 뜻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유해 아직도 못 찾아
필자는 1990년 중국 취재 길에 뤼순감옥 현장을 방문했다. 뤼순감옥 내부 견학을 요청하였으나 그 때는 한-중 수교 전이라 허락을 받지 못하고 건물 마당에서 안중근 의사의 구국정신과 민족사랑 애국심에 감동하면서 명복을 빌어드린 뒤 건물을 바라보는 것으로 울분을 삼킨 일이 있다. 다만 안내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뤼순감옥은 본래 러시아 사람들이 지은 벽돌 감옥인데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뒤 접수하여 크게 늘렸다. 안중근 의사는 이 감옥의 지하에서도 가장 구석진 특수감방에 구금되어 있다가 교수형을 당했다. 다른 사형수들은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죽은 뒤에 그대로 매장하였으나, 안중근 의사는 한국식의 나무관을 마련하여 관속에 넣어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과 관련하여 너무나 끔찍한 사연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로 들으면서, 민족의 영웅 순국에 더욱 안타까움을 접을 수가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너무나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되었다는 설,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문을 가한 뒤 사형을 집행하였다는 이야기, 나중에 공동묘지 무덤까지도 없애버렸다는 사실들이 바로 그런 끔찍한 이야기들이라고 사학자들은 전한다.

오죽하면 유족들이 관의 뚜껑을 뜯고라도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호소하였겠는가? 하지만 일제는 유가족의 그런 요구도, 시신 인도 요구도 모두 묵살하면서 자기들 관련자들만이 안중근 의사의 사형을 집행하고 시신을 매장하였을 뿐, 그 밖의 일은 지금까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있다.

위대한 영웅, 영원한 거인 안중근 의사는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어떻게 사형이 집행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순국하였고, 또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대한 발자취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와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 객사한 사람을 고향으로 옮겨다 장사지내는 것)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나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민주 땅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남긴 말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싸운 안중근 의사는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대인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하여 준다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식민통치의 굴레를 다져갈 때 그 원흉을 저격한 민족의 큰 영웅이다.

동양평화론》집필중 순국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쓴《동양평화론》은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애국심이 가득 담긴 이야기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했다는 평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동양평화론》서문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 중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분명한 형세이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일은 의거이며, 이 의거는 동양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강조하였다.《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 즉 서구 열강의 세력이 점차 동양으로 이동하는 새로운 식민주의 추세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였다.

동양 3국의 평화를 위해 세 나라가 싸울 것이 아니라 각자 독립국가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 동양의 평화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토의 일본식 동양평화 주장은 식민지를 합법화 하려는 괴변이라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서 저술한 이 책을 통해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사항구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 등 여러 가지 내용들을 담아 놓았다.

사형 집행 때문에 미완성으로 끝난 채 옥중 저서가 된 동양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단순한 의거에서 더 높은 차원의 ‘동양평화 의전(東洋平和 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의전(義戰)은 옳은 일을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나의 하얼빈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여기 임석한 제원들도 앞으로 한국과 일본 화합에 힘쓰며, 식민지 정책을 버리고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

중국 하얼빈 시 안성거리 조선민족예술관 2층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하얼빈 시와 우리나라 독립기념관 등의 지원을 받아 2006년에 마련하고 운영 중이다. 여기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 의거 당시의 모습, 각종 관련 유물 등을 진열 전시하고 있다. 기념실 앞에서는 중국인들도 “안중근 의사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라며 존경하고 추모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웠으면 한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다. 한국에서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

“안중근 의사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숙열해 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긴 동양평화론은 국권 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새로운 지표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 체계로 높이 꼽힌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온몸을 던져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위대한 항일 독립투사이자, 나라의 독립과 민족을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을 몸소 보여준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남긴 유묵들은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유묵 25점의 소재와 소유자가 서로 다르고, 형식도 일치하지 않아서 25점이 모두 569호라는 동일한 번호의 문화재로 지정되고 569-1, 569-2, 569-3호 등의 순번으로 이어졌다.

유묵은 거의 다 두 줄로 내려 쓰되, 왼쪽에는 ‘경술삼월 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 곧 庚戌三月 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라고 붓글씨로 쓴 뒤 낙관 대신에 왼손 무명지의 끝 마디를 잘라 단지동맹을 한 손으로 장인(掌印 ; 손바닥 도장)을 찍어 놓았다. 글을 쓴 때와 장소를 기록하고 장인을 찍어 안중근 의사의 유묵임을 확실히 밝힌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안중근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여 위대한 업적을 기렸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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