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24세 젊은 나이로 순국, 영원한 업적

도시락 폭탄 던져
1932년 4월 29일 오전 7시,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와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손목시계를 풀었다.

“선생님! 이 시계는 선생님이 준 돈으로 샀습니다. 선생님의 시계보다 이 시계가 좀 더 좋으니 선생님께서 차시고, 선생님 시계를 제가 차겠습니다.”

윤봉길은 자기의 시계를 김구에게 드렸다. 순간 김구는 목이 메어 말을 잊었다. 죽음의 길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서 이제 좋은 시계는 필요 없다는 대장부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자! 선생님 이제 떠나겠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윤봉길의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태연하였다. 하직 인사를 받은 김구는 윤봉길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였다.

“음! 도시락 잘 챙기고 물통 잘 간수하게!”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과 물병을 든 것은 일본의 포고문에 따른 것이다. 천장절 행사에 즈음한 포고문은 점심 도시락 1개, 물통 1개, 일장기 1개만을 휴대하고 입장하라는 것이었다.

중국 복장으로 가장한 윤봉길은 자동차를 타고 거사 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다. 그런 윤봉길의 뒷모습을 본 김구는 비장한 각오로 기도를 올렸다.

“하늘이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마지막 길을 떠나는 이 젊은이를 보호하소서!”

거사 장소에 도착한 윤봉길은 마음을 가다듬고 태연한 자세로 거사 시작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려야 한다!”

시계는 오전 11시 50분, 이제 10분이 지나고 낮 12시 정오가 되면 천장절 기념식이 열린다. 천장절 행사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행사이다. 이날 일본을 상하이를 점령한 사변 전승을 기리는 행사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다.

행사장 무대 가까이로 다가선 윤봉길은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사랑하는 부모형제여!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순ㄱ산을 선택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영원하여라!”

정오가 되자 무대 위로 요인들이 올라와 의자에 앉고 기념식을 알리는 개회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윤봉길은 용수철처럼 솟아오르며 힘차게 도시락 폭탄을 무대로 던졌다.

“쾅! 콰앙!”
도시락 폭탄은 윤봉길의 마음을 알아주듯 힘차게 터졌다. 폭탄은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파편을 사방으로 날렸다. 단상 무대에 앉았던 침략의 원흉들이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 무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는 즉사하고, 상하이 파견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치명상을 입고 한 달에 죽었으며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시게미쓰 공사, 무라이 총영사,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 신문사 특파원 등이 중상을 당하였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만세!”

윤봉길은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고 또 부르다가 당당하게 체포되었다. 현장 취재를 하던 외국기자들은 체포될 당시의 윤봉길 의사의 태도를 이렇게 썼다.

“거사 뒤의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씩씩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당당했다.”

‘인간 폭탄 윤봉길’로 칭송을 받은 윤봉길 의사는 세계만방에 일제의 잔악함을 몸으로 웅변하고 순국한 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있다.

호외로 쏟아진 대참사 뉴스
윤봉길 의사의 훙거우 공원 거사가 성공되었다는 긴급 뉴스가 상하이를 흔들고 지구촌으로 타전되었다.

“일본 천황 천장절 경축 행사장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 가와바타 즉사, 시라카와 대장,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시게미쓰 공사 중상, 식장은 피바다, 범인은 현장서 체포.”

범인을 처음에는 중국인으로 보았다가 나중에는 한국인인 윤봉길로 밝혀졌다는 호외가 다시 나왔다. 사건의 윤곽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드러났다.

당시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중국의 백만 대군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했도다! 정말 장한 일이다!”

일본 군대는 윤봉길을 일본 오사카로 이송하여 심한 고문을 강행하였다.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할 일을 스스로 그리고 당당하게 했다. 배후는 없다. 나의 조국과 국민이 배후다!”

윤봉길은 가혹한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도 굽힘 없었다. 그러나 일본 군사법원은 윤봉길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30분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집행하였다.

순국한 지 14년이 지난 1946년 5월 유해로 고국 품에 안겨 7월 7일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1일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 윤봉길 의사를 순국정신을 기렸다.
충남 예산 출신 식민지 교육 거부
매헌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관 장군의 27대손이며 윤황과 김원상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 때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중퇴한 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1살 때 3.1독립만세를 본 뒤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4살 때 배용순과 결혼한 그는 14살 신랑으로 글짓기에 나가 장원하고 농촌 계몽운동에 뜻을 두었다. 18살 때 서당의 한학 수업을 중단하고 야학(夜學)을 세우고 <농민독본>과 독서회를 만들어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21살 때 월진회를 만들고 회장을 맡았다가 독립운동가의 큰 뜻을 품고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세탁소, 모직 공장 직공 등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31년 상하이로 내려가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들어갔다.

윤봉길은 상하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가졌다. 태극기 앞에서 손을 들고 민족 앞에 맹세를 한 것이다.

“나는 적성(積誠)으로 조국에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왜적의 군 수뇌들을
도륙(屠戮 ; 무찔러 죽임)하기로 맹세합니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이는 개인적인 충성심은 물론 국가와 민족 앞에 엄숙히 선언한 민족적 의지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이다.

윤봉길 의사 유품
윤봉길이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 것은 평소 김구로부터 받은 감화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김구에 대한 존경심을 글로 남겼다.

“높고 높은 저 청산같이 만물을 실어 기른다.
저 빽빽한 소나무처럼 사시장철 변함이 없다.
저 깨끗한 봉의 날개는 천 길이나 드높게 날아다녀
온 세상 모두 흐려도 선생만은 홀로 깨끗하다.
늙을수록 더욱 씩씩한 것 이것은 전쟁의 그 의기일 뿐
꿈에도 잊지 못할 것은 선생의 붉은 정신이어라.”

윤봉길이 1929년 음력 정초에 쓴 일기도 전한다. 이 일기는 훙거우 공원 거사를 하기 3년 전에 쓴 것이다.

“가도 만류하지 못하는 것은 세월이라 60초가 1분, 60분으로 1시간, 24시가 1주야,
자전을 마치고 사정없이 펑펑 돌아가는 지구가 어느덧 3만 6000의 자전을 마친다.
이것이 한 사람의 일생이다. 아! 무정한 저 광음이 인생을 얼마나 희생하였는고.
참! 붓으로 기록할 수 없는 고통, 번민, 노력…”

이 일기를 비롯하여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품은 모두 보물 5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남 덕산 충의사 사당 또는 국립중앙박물관, 매헌기념관 등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유품으로는 한인애국단 입단 자필 선서문 및 자필 이력서와 유서, 훙거우 공원으로 갈 때 김구와 바꿔 찬 회중시계, 지갑과 지폐, 윤봉길신(尹奉吉信)이라고 새겨진 도장, 안경집, 자필 일기 1권, 월진회 창립 취지서, 농민독본, 사형 당할 때 묶였던 형틀, 윤봉길 의사의 편지 등이다.





유한준

- 現 아동문학가, 시인, 저술가 활동
-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역임
- 前 종교뉴스신문 편집주간
- 前 뷰티투데이 편집국장

- 前 독서신문 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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