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은 장어요리 전문식당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고려에서 조선에 걸쳐 공직자로 재직하면서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지입니다. 반구정은 갈매기와 함께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정자라는 뜻입니다. 임진강을 바라보는 운치가 있는 곳이지만 지리적으로 북한 개성 및 개풍군 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라 임진강 주변에 철책선이 있고 육군 경계 초소가 있어서 군사적인 긴장감이 돌기도 하는 곳입니다. 지난 주말 장어를 제일 좋아하는 막내아들과 함께 장어도 먹고 황희 정승 사적지를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습니다.

황희 정승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태어나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음서(일반 공개 채용이 아닌 추천에 의한 특별 채용 제도로써 연고 등 특혜 시비가 많았음)로 녹사(8~9품의 실무를 맡은 서리 직책)라는 관직을 시작하여, 조선 세종 1449년 87세에 벼슬을 물러나기까지 벼슬살이만 73년을 하였고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을 합치면 정승의 자리에만 24년을 있었습니다. 태종 때부터 지신사(비서실장)를 시작으로 6조 판서(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병조)직을 모두 역임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20개 정관직을 모두 역임한 셈입니다. 고려와 조선에 걸친 2개 왕조에서 관직을 맡았고 고려 우왕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 무려 7명의 왕 치하에서 벼슬을 하였으니 관운은 억세게 좋은 것이 틀림없는 듯합니다. 여러 왕을 모시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면서 그 많은 세월 속에 얼마나 많은 소신과 변절로 평가될 사건들이 있었을까 짐작하면서 그 생애에 겪었을 대표적인 2가지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사건은 두문동 사건입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고려의 유생들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 마을로 들어가(이러한 두문동 72현 전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반대의 견해도 있습니다) 고려의 신하로 절개를 지키기 위해 고려 신하 때 입었던 옷과 관을 고갯마루에 걸어두고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고 숨어서 지냈다고 합니다. (두문불출은 杜:막을 두, 門:문 문, 不:아니 불, 出:날 출, 문을 막고 밖으로 나아가지 않는 다는 뜻임) 인재가 필요했던 조선 태조 이성계는 온갖 방법으로 회유를 하지만 개성 유생들이 대부분 뜻을 굽히지 않자 두문동에 불을 질러 은둔해 있던 선비들을 죽이고(두문동 72현 전설) 개성 유생 출신들의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개성 유생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선택하게 되었고 훗날 개성상인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황희는 조선 개창에 반대해 은둔한 선비들 중의 일원이었고, 두문동 동료들이 황희를 벼슬길로 천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방원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문동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황희는 고려의 유생이면서도 새로운 왕조인 조선조에서도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고려의 신하로서 끝까지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새 왕조 조선의 신하로 살아간 것을 두고 변절인가 소신인가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태종 때 세자 폐위사건입니다.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태종 18년(1418년) 새 왕조 조선에 정치적 파란이 일어나는데, 바로 당시까지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사건입니다. 무릇 세자의 교체는 자칫 엄청난 살육을 불러올 정도로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입니다.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것은 계속되는 세자의 잘못된 행동 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폐위시킨 태종도 어렵게 세운 새 왕조의 명운이 걸린 문제에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황희가 세자의 폐위를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당시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황희는 대부분의 신료가 세자 폐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 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라며 국왕의 판단에 재고를 요청하였지만 태종과 주위 대부분의 신료는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희를 지탄하였습니다. 황희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마침내 강등되어 귀양 갔고, 태종은 여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합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으나, 만약 태종이 황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성군 세종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종은 즉위 즉시 남원에서 5년간 유배 생활 중인 황희를 받아들여 승하하기 4개월 전인 1449년(세종 31년)까지 계속 관직에 머물게 합니다. 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황희가 세종의 신하로 장기간 복무한 것이 변절인가 소신인가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짧은 시간동안 한 시대만을 살았던 사람들은 소신과 변절에 관하여 쉽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오랜 시간을 여러 시대에 걸쳐 살았던 사람들은 소신과 변절에 관하여 과연 쉽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민주화 시대에는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서 여러 정권에 걸쳐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황희 정승의 긴 일생을 살펴보면서 소신, 변절, 일관성, 미래에 대한 혜안, 수구 보수와 진보 개혁, 전통적 가치의 수호, 시대 변화에 따른 적극 대응 등의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외뉴스통신/내외경제TV 상임고문 임정혁

- 현, 법무법인 산우 대표 변호사
- 법무연수원장

- 대검찰청 차장검사, 공안부장

- 서울고등검찰청 고등검사장, 형사부장

- 중앙고,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연수

- 제26회 사법시험(연수원 16기)합격, 제28회 행정고시 합격

- 황조․홍조․근정훈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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