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에 관해 물어오는 대중에게 3분의 1은 지금 자신을 위해 쓰고, 또 다른 3분의 1은 앞 날을 대비해서 모으고, 나머지 3분의 1은 남을 위해 쓰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와 이타적 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번 돈의 30% 이상을 남을 돕는 데 쓰라 하셨을 테지만 강제 징수 당하는 세금이라면 몰라도 그 정도를 자발적으로 내 놓기엔 범부중생으로선 솔직히 좀 아깝단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물며 3.3.3 원칙은 고사하고 없는 돈을 미리 끌어다가 남을 위해 썼다면 요즘 같은 세상에선 칭찬보다는 미련하단 소리를 들을 겁니다. 그 미련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몇 년 째 아프리카 아이 하나에게 작은 돈을 보내고 있는데 제가 한국에 오래 머무는 바람에 호주에서 자동 이체되던 계좌의 잔고가 바닥이 났습니다. 저의 재정 상태로나 변변치 않은 현재 수입으로나 후원금을 계속 내기엔 형편이 도저히 닿지 않아 딴엔 몇 달 간 가슴이 탔습니다.

쓰고 남는 돈은 아니었지만 바깥에서 사 먹는 밥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만 줄이면 호주에 살 적엔 큰 부담 안 가지고 보낼 수 있었던 액수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 돈으로 깨끗한 물도 마시고 학교도 다닌다며 제게 감사 편지를 보내옵니다. 내겐 대수롭지 않은 돈에 한 어린이의 장래가 걸려있다는 사실에 ‘영혼이 담긴 편지’를 받을 때면 제가 도로 황송해 집니다. 지금도 시드니 제 집 냉장고에는 까까머리에 검은 얼굴로 유독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시, 만약’을 대비해 아이에게 답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만약에라도 후원금을 끊게 되거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없게 될 때를 생각하여 돈은 힘 자라는 데까지 보내주되 정은 주지 않으려는 얍삽하고 비겁한 속내 탓입니다.

아이와의 인연은 깊어지고 사정은 이리 딱한데 내 수중에 돈은 없으니 속이 탈 밖에요. 그러나 어쩝니까.

‘내가 무슨 폐지 모은 돈으로 불우 청소년에 장학금을 기탁하는 독거노인도 아니고, 코제트를 돌보겠노라 여생을 걸고 약속한 장발장도 아닐 바에야 허세를 부릴 수도 없고, 돈이 없는 데 별 수 없지. ’라고 생각을 단호하게 접기를 몇 차례,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또 마음이 달라져서 ‘너 그렇게 살지마’ 하며 속에서 야단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설마 굶어 죽기야 할까, 하긴 몇 끼 굶어도 하는 수 없지, 일단 보내놓고 보자.’ 며 최종 단안을 내리고 급기야 돈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체증이 가라앉듯 속은 시원한데 결국 제 은행 잔고에서 한 달치 방세가 비었습니다.

이럴 때 저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신다고 배웠습니다만, 빠진 돈을 메울 길이 없다면 한 달 간 길에 나 앉거나, 아니면 밥을 구걸하거나.., 찬송가 제목처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상태에 빠졌습니다.

제 경제 사정을 뻔히 아는 지인 및 가족, 친지, 친구 여러분, 지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 넓은 짓을 했다며 혀를 차실 테지요?

걸핏하면 제게 밥을 사주시는 분, 노상 사주시는 분, 계절 따라 원족까지 가서 사주시는 분, 밥 사주고 테이크 아웃 백에 택시비까지 쥐어 주시는 분, 아무나 최소 한 달 간 잘 부탁합니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도 재물의 3분의 1은 이웃에게 베풀라 하셨으니.

약간 엄살이지만 벼랑인 줄 알면서도 뛰어 내릴 수 밖에 없는 극한의 나날을 보내는 요즘 전에 없던 경험을 합니다. 이 나이에 앞가림에 급급한 극한의 경제적 고통과, 할 수만 있다면 쥐라도 한 마리 키우고 싶은 극한의 외로움, 학력, 미모가 평준화된 처지의 극한적 미래 불투명 등에 매 순간 마주합니다.

그런데 참 요상한 것은 얼음장 밑으로 찾아오는 봄처럼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어떤 힘이 심지로부터 솟는 것 같고, 그 힘이 진짜 힘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를 딛고 오른 새 살처럼 비로소 세상을 당당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제야말로 내가 내 삶의 진짜 주인인 것 같고, 무엇보다 이제는 그 아이의 편지에 답장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집니다.

여유 있을 때는 되레 자신 없던 일- 후원금을 끊어야 할 일이 생기면 어쩌나 염려하던 일-이 내 입에 들어갈 밥, 내 일용할 양식을 딱 덜어주고 나니까 오히려 할 수 있을 것 같아지니.., 아이러니합니다. 아마도 이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배운 '극한 요법' 덕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석가모니의 ‘3분의 1 보시 원칙’도 내 것을 덜 쓰더라도, 내 것을 덜어서라도 나눔과 베품을 일상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www.bistromeme.com)를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 학교, 중앙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공저<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자유칼럼그룹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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