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참 재미가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나마 <일리아스>보다는 <오뒷세이아>가 잘 읽힌다. 

<일리아스>는 전쟁 영웅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인간적 고뇌나, 내면의 슬픔, 생명의 외경 같은 건 애당초 없다. 결말부분은 좀 낫다. 전우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통곡하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 인도를 애원하는 늙은 아버지, 프리아모스. 이 지점에서 책장은 조금 빨리 넘어간다. 비로소 ‘인간’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인간 내면의 풍경 같은 건 없다.  

사실 <일리아스>로 대변되는 그리스 정신에서 ‘인간성’이나 ‘인간적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면 낭패하기 십상이다. <일리아스>에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웅들만이 출현한다. 울고 짜고 ‘찌질하게’ 하소연하고 공감하는 ‘병든’인간은 출현하지 않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한편 남들보다 월등히 용맹스러운 두 전사, 
아레스 못지않은 아이네이아스와 이도메네우스는
무자비한 청동으로 서로 상대방의 살을 베기를 열망했다.
아이네이아스가 먼저 이도메네우스를 향해 창을 던졌으나
똑바로 보고 있던 이도메네우스는 청동 창을 피했고,
아이네이아스의 창끝이 부르르 떨며 땅에 꽂혔다.
창이 그의 억센 손에서 헛되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도메네우스는 오이노마오스의 배 한복판을 맞혀
그의 불룩한 가슴받이를 찢었다. 청동이 그의 내장을 쏟자
그는 먼지 속에 쓰러지며 손바닥으로 땅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이도메네우스는 시신에서 그림자도 긴 창을 뽑았으나,
그 밖의 다른 아름다운 무구들은 어깨에서 벗길 수 없었다.
날아다니는 무기들이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숲, 천병희, 390쪽>

이외에도 눈알이 튀어나오고, 돌덩이로 머리를 둘로 쪼개고, 사지가 꺾이고, 피가 솟구치고 등등 문장이 무시무시하다. 일련의 이런 내용의 건조한 반복이 현대인의 감흥을 얻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들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목숨을 겁 없이 던져버리는 영웅의 삶을 우리 중 누구도 선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소하고 허약한 인간의 삶을 살고 있으며 그 삶에 붙들려 있다. 한마디로 그들과 다른 신체, 다른 감각, 다른 사유, 다른 인식 속에 사는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 정신을 긍정한다. 니체가 긍정하는 그리스정신은 일리아스에 나타나는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 종족일 것이다. 니체의 ‘주인도덕’ 역시 이들 ‘귀족의 정신’에서 연원했을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오늘 날의 선악 개념에 이르기까지 이중의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된 것’이다.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에서 나온 선과 악의 개념은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보복하고,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을 선하다’고 규정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선한 사람들이라고 보고 집단을 형성했지만, 보복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은 ‘아무런 공통된 감정이 없는 종속적이고 무력한 무리’에 속해 결국 몰락했다. 현재 우리의 도덕은 전자에게서, 즉 ‘지배종족과 계급의 토양’에서 나온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의 배타적인 사회 계층이고, 악한 사람들은 먼지 같은 대중이다. 선함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 같은 관계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적을 악하게 보지 않는다. : 그는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호메로스에게는 모두 선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자가 아니라 경멸스러운 자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선은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유전된다.: 나쁜 사람이 아주 좋은 토양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45>

 이 같은 인식기반을 근거로 후기작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파울 레의 <도덕 감정의 기원>을 맹비난한다.(도덕의 계보 서문과 제1논문) 니체는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저급한 사람, 천민적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다고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라고 추론한다. 고귀한 사람은 강한 사람, 높은 사람들, 지배종족이고 ’좋음‘은 이들에게 있는 특성이다. 이들 ‘선한사람들’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신을 ’좋음‘으로 평가한다. 이제 좋음은 고귀함으로, 강함으로, 높음으로, 최고의 것으로 나간다. ‘지배종족이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은 ‘나쁨’이고, 이것이 좋음과 나쁨의 기원이라는 설명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를, 이 <도덕 감정의 기원>의 저자 파울 레도 동시에 사랑했고, 이들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사랑에 참으로 미숙했던 우리의 니체는 루 살로메에게 첫눈에 반한다. 마음을 빼앗긴 이 시기의 니체 나이는 서른 여덟, 살로메는 스물 한 살이었다. 아름답고 지적인 이 여인에게 숫기 없는 니체는 ‘굴욕’만을 맛본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른다. 연서를 써서 친구 파울 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친구는 니체를 배신한다. 파울 레 역시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니체와 파울 레는 연적 관계였으나, 어리숙한 니체는 알라채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세 사람은 한동안 집을 얻어 공부하고 토론하며 함께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파울 레와 살로메는 니체가 잠시 고향에 간 사이 ‘야반도주’한다. 도망쳐온 파울 레와 살로메는 베를린에 정착하지만 살로메는 평생 파울 레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잠자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파울 레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치명적인 여인’ 살로메는 그 후 프로이트, 릴케 등과도 염문을 낳았다. 지성과 미모를 두루 갖춘 그녀의 아름다움에, 내놓으라 하는 서구 남성들이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
 
니체는 살로메에게 직접 청혼도 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아무튼 사람 관계에 어눌하고 사랑에도 서투른 니체가 오매불망 사랑한 여인을 ‘가로 챈’ 장본인이 제자이며 친구인 파울 레였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 그런 연적이 쓴 <도덕 감정의 기원>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 보기 좋게  난파된다. 국내의 니체 관련 평전들에 따르면 파울 레는 영국신사로 인품도 괜찮은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런 일을 겪은 한참 후 니체는, 파울 레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즉 파울 레가 한 행동(살로메와 달아난 사건)은 니체 자신이 하고 싶었던 행동이었다고.   

아무튼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좋음’과 관련해 어원학적 관점에서,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고귀한’ ‘귀족적인’이라는 이 기본 개념이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 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으로 발전해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은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고 설명한다. 결국 ‘정치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이 언제나 ‘정신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족적 가치의 등식은 ‘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 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귀족도덕, 즉 주인도덕이다.

반면 ‘노예도덕’은 ‘주인도덕’이 자기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난 것과 반대로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주인도덕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며’ ‘자기 자신에게 더 감사하고 더 환호하고 긍정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물’을 찾을 뿐, 노예도덕에서처럼 원한에 의해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자기긍정이 아니다.

“출신이 좋은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먼저 적을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경우에 따라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설득하거나 기만할(원한을 지닌 모든 사람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필요가 없었다. 그와 같이 그들은 힘이 가득 넘쳐나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인 인간으로, 행복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활동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행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 - 이 모든 것은 무력한자, 억압받는 자, 독이 되는 증오의 감정으로 곪아터져 고통을 느끼는 자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행복과는 아주 대조를 이룬다.” <도덕의 계보, 10> 

해서 지상에 ‘적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고귀한 인간에게서만 가능하다. 고귀한 인간은 저급한 하층민에 대해서는 경멸하지만 자기와 동등한 적에게는 경외심을 갖는데 경외심은 ‘사랑에 이르는 다리’라고 말한다. 고귀한 인간이 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것이라고. 이 때 적은 ‘경멸할 것이 전혀 없고 존경할만한 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원한을 지닌 노예도덕의 인간은 적을 ‘악한 사람’으로 생각해내고, 온갖 악행을 일삼는 사악한 것의 대립물로 자신을 선한 인간이라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양의 입장은 양이 선해서가 아니고 힘이 약해서인데, ‘약함’을 선함으로, 양을 잡아먹는 맹금을 악한 것으로 파악한다. 사자가 양을 안 잡아먹을 수 있을까? 양이 힘이 강해져서 사자에게 안 잡아먹힐 수 있을까?라고 니체는 묻는다. 사자의 입장에서는 자기와 동등한  위치인 호랑이 정도를 적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존경하지 않을까 싶다. 반면 양은 경멸한다. 이때 사자는 양을 ‘나쁘다’고 말한다.

즉 고귀한 인간은 ‘좋음’의 개념을 자기에게서 만들어내고 ‘병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자 ‘보색’을 ‘나쁨’이라고 이해한다. 해서 고귀한 인간의 ‘좋음’은 ‘야수성’ ‘사려 없음’ ‘야만성’ 등등의 개념을 포괄한다. ‘나쁨’은 고귀한 인간이 경멸할만한 것에 붙여주는 이름이다. 이때 ‘나쁨’에 대해 어떤 원한도 증오도 없다. 그러나 노예도덕에서 만들어 내는 ‘악함’은 원한과 증오의 도가니에서 나온 것이라는 입장이다. 사실 양의 입장에서 증오와 원한을 갖는 것은 당연할 듯하다. 바로 이런 감정이 ‘노예도덕’의 특성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주인도덕을 지닌 자로 살까? 원한과 증오와 약함과 두려움에 사무친 노예도덕을 견지할까? 하는 물음이 나온다. 고민할 지점이다. 강자와 약자를 니체처럼 파악하면 그야말로 무기력해진다. 맹금들이야 좋겠지만 양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먹히면서 살아야 할까? 니체의 논리대로라면 양이 힘을 길러서 사자나 호랑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요는 주인의 도덕은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좋아하고 힘이 넘치는, 말하자면 그리스의 영웅과 흡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니체의 이런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까? 미지수다. 다만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좋아하고 힘이 넘치는 능동형의 인간, 자기를 지배하는 인간. 심지어 적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간. 그러나 경멸스러운 인간에게는 구토를 느끼는 인간의 역동하는 에너지를 생각해볼 뿐. 이는 그리스문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트로이전쟁에서 양측은 서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없다. 승패만이 있고 죽음과 삶만이 있고, 운명에 대한 순종만이 있다. 지금 우리와는 너무 멀리 있는 그리스의 정신을 니체가 모범으로 종종 제시하는 이유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이곳의 삶에서 잠시 떠나 멀고 먼 옛날 영웅의 시대, 그 오래된  새로움에게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을 뿐이다. 그 곳에는 운명에 용감히 직면했고, 삶의 매순간을 ‘힘에의 의지’로 살아낸 정직한 영웅들이 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는 ‘무모한 ’용기와,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버리는 사람들. 그 옛날 영웅들은 목숨 걸고 겨루어서 왕이 되고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쟁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내 생각에 니체가 그리스인들을 긍정하는 좋은 특성은 이런 것이다. 용기와 잔머리 굴리지 않는 정직함, 가장 소중한 내 것(목숨도 포함)을 내놓는 결단, 단순하고 소박한 삶, 그런 자신에게 기뻐하고, 적에게도 자신에게도 영웅이라는 칭호를 주며 존경하는 것, 필멸의 삶을 긍정하는 것. 

그런데, 트로이 목마는 그리스 측의 명백한 간계니 정당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니체님!


***매주 게재되던 <천경의 니체읽기>는 필자의 사정으로 앞으로는 격주(첫째, 셋째 주 화요일)마다 게재됩니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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