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비둘기 한 마리가 13일 밤부터 대궐 숲에서 울었다. 마치 ‘각각화도’ 또는 ‘각각궁통개’라고 우는 듯했다. 소리가 몹시 슬프고도 다급했다. 수일 동안 분주하게 오가며 온 성안을 두루 날아다니면서 울어댔다. 어떤 이는 바다에서 왔다고, 어떤 이는 깊은 산중에 그런 새가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에는 죽은 자라들이 상류로부터 강을 뒤덮고 떠내려 왔다. 강물마저 붉게 변해 사람들이 크게 걱정했다.”

“서울(王道)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사비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위 두 글은 매우 흡사하다. 공통점은 망국의 조짐을 기록한 역사 기록이라는 점. 후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 2월 기록이다. 평행이론이요, 데자뷔다. 그렇다면 처음 내용은 대체 어느 나라 망조인 것인가? 1592년(선조25) 4월 30일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 무렵 새가 이상하게 울고, 자라가 죽고, 물빛이 변하는 변괴가 있었다는 것.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그날 밤부터 대궐의 비둘기는 진혼곡을 울렸다. ‘각자 화를 피해 도망쳐라(각각화도·各各禍逃)’ ‘각자 활 등으로 무장해라(각각궁통개·各各弓筒介)’. 놀랍게도 야사(野史)나 괴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 가장 공신력 있는 실록에 나타난 기록이다. 설령 과장이 포함됐더라도 허위를 날조하지는 않았을 터. 임진왜란의 발발을 알린 것은 선전포고문이 아닌 비둘기였다.

■ 비둘기 때문에 살해당한 금강야차 이의민

우리나라에서 비둘기를 관상용으로 기른 사실은 고려 때부터 확인된다.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한 이의민은 힘이 장사라서 ‘금강야차’로 불렸다. 1127년 베트남에서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망명한 베트남 리(李) 왕조 이양혼의 손자다. 이민 3세인 셈.

1196년(명종26)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장군이 됐다. 그는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애지중지 키우던 애완 비둘기를 빼앗았다. 화가 난 최충수는 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의민 부자는 세력을 키우던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됐다.

13년간 지속한 이의민 정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최충헌은 이의민의 3족을 멸했다. 아들의 비둘기 강탈 사건 때문에 어이없게 이의민이 죽으면서 고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4대, 62년 최씨 무인 정권의 서막은 비둘기가 도화선이 됐다.

최충헌에 이어 집권한 최우는 1227년(고종14) 12월, 사사롭게 비둘기와 매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공무를 돌보지 않기 때문. 당시 고려에서 관상용 비둘기와 매사냥 열풍이 얼마나 거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뜻으로 ‘충’을 넣어야 했던 충렬왕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사냥과 연회에 몰두했다. 재위 3년 차인 1279년 3월, 그는 민간의 비둘기를 빼앗었다 돌려줬다. 재위 24년 동안 무려 55번이나 매사냥에 나섰으며, 구경한 것도 다섯 번이나 된다. 한 해 두 번 이상 즐긴 셈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호랑이가 개경과 궁궐에 나타난 것은 13회이다. 성격 또한 별났다. 산 고니와 따오기의 배와 등의 털을 뽑은 다음 놓아주고, 매가 달려들어 뜯어먹는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

충혜왕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 최강 막장 군주로 손꼽힌다. 1343년 3월 밤 충혜왕은 애첩 등을 거느리고 민천사 누각에 올라가 비둘기를 잡다가, 불똥이 튀어 절집을 홀랑 불태웠다. 그는 희대의 패륜아이자 난봉꾼이었다. 조선 연산군과 투톱, 막상막하 쌍벽을 이뤘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 간 2번째 고려왕이 됐다. 그가 죽자 모든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

충혜왕의 동생이었던 공민왕의 비둘기 사랑도 극진했다. 1368년 공민왕은 궁궐 안 수백 곳에서 비둘기를 키우면서 새장 만드는 비용으로 베 1000 필을 사용했다. 사료로 매달 곡식 960kg이 들었다. 공민왕이 죽자 그 비둘기는 아들 우왕이 아끼고 사랑했다.

■ 본격적으로 애완 비둘기 문화가 성행한 것은 영조 때부터

조선 초 비둘기는 다른 동물들과 함께 일본과 외교 선물로 자주 쓰였다. 비둘기는 일본에서도 자생해왔지만, 관상용으로 기를만한 색이 예쁜 비둘기는 보기 힘들었기 때문. 지금도 일본 공원에는 비둘기보다 까마귀가 더 많다. 1394년(태조3) 이성계는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의 부탁으로 집비둘기 세 쌍을 보냈다.

1408년(태종8)에는 비둘기 5마리와 염소 2쌍, 1420년(세종2)에는 흰 비둘기와 오리 각각 두 쌍, 까치 다섯 쌍을 줬다. 이후에도 1430년(세종12)에는 비둘기와 오리, 거위, 두루미, 염소와 산양, 다람쥐와 까치를 1431년(세종13)에는 큰 개 3마리와 수탉, 학, 꿩, 비둘기 등을 요구해 일본에 보냈다.

1426년(세종8) 4월에는 왕실 농장 상림원의 화초와 집비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줬다는 기사가 나온다. 관상용 비둘기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 때는 응방에서 매를 기르는 응사 말고도, 비둘기 전담 사육사가 4명이나 됐다. 적지 않은 비둘기를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중종 4년(1509년)에는 궁궐 옥상에서 집비둘기의 소리를 듣고, 이를 쫓아버리라고 신하들이 아룄다.

중종은 “자신이 기른 애완동물이 아니라 산비둘기가 저절로 날아든 것을 어떻게 쫓아 버리는가?”라고 답하자 모두가 웃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1538년(중종33)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실록이 모두 불타는 일이 벌어졌다. 관청 소속의 노비가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불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광해군 즉위 초 유배됐다가 죽은 임해군은 종친에게 비둘기 상납을 강요하는 등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다.

1749년(영조25) 궁전 들보에 비둘기가 있는 것을 보고 신하들이 영조에게 애완 비둘기를 키우는지 물었다. 영조는 “밖에서 날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 본격적으로 애완 비둘기 문화가 성행했다. 진귀하고 아름다운 비둘기는 고가에 거래되거나 선물용으로 쓰였다. 재력이 있는 애호가들은 8칸 비둘기집(용대장)을 갖추고, 희귀하고 값비싼 비둘기를 더 많이 사들이려 경쟁했다.

심지어 정조 연간 실학자 유득공은 <발합경>이라는 비둘기의 품종과 사육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을 지었다. 그 시절 23종에 달하는 애완용 비둘기 사육 취미는 참 흥미롭다. 유득공과 이종사촌 이옥은 “비둘기란 새는 이미 시각을 깨우쳐주지도, 제사상에도 오르지 못한다”고 비둘기 관상문화를 비판했다. 구리철사로 만든 새장 조롱의 값이 수천 전씩이나 한다고 적었다.

■ ‘노상추 일기’에 나타난 애완 비둘기 문화

순조 연간 경북 구미가 고향인 노상추(1746-1829)라는 무인이 살았다. 1780년(정조4) 35살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68년간 쓴 일기에는 조선 후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나이 23세 때 일기에 나오는 비둘기 이야기를 국내 최초로 들여다본다.

“1768년(영조44) 3월 4일. 볕이 나고 바람이 조금 불더니 저녁에 흐림. 지난번에 도망갔던 흰 비둘기가 오늘 왔다. 지난 8일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또다시 돌아오니 신기하다. 하찮은 새도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구나. 3월 9일 볕이 남. 오후에 지난번에 달아났던 흰 비둘기가 다른 흰 비둘기 2마리를 데리고 자신의 둥지로 들어왔으니 신기하다.”

3월 27일 일기에는 애완 비둘기를 가져간 친척 이야기가 나온다. “구미시 도개면에 사는 박상택 아저씨가 찾아왔는데 ‘자허두(紫虛頭)’ 1마리를 소매에 넣어 가져갔다.” 자허두는 집에서 길렀던 애완 비둘기의 한 종류. 몸통은 희고, 머리와 목이 자줏빛이다. 4월 초4일. “지난 3월 말 박상택 아저씨가 소매에 넣어가지고 간 자허두 비둘기가 스스로 돌아왔다. 듣자니 박 아저씨가 소매에 넣어갔을 때 직접 초곡의 조 찰방 집에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엿새가 지난 뒤에 찾아서 돌아왔으니 신기하다.”

노상추의 일기에는 비둘기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마치 오늘날 애견, 애묘인이 SNS 등에 글을 올리는 것에 비유된다. 서울이 아닌 지방 사대부 집안에서도 애완비둘기 문화가 폭넓게 퍼져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비둘기를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새로 생각했다. 한 번 짝을 맺으면, 죽기 전까지 바꾸지 않는다. 왕손 가수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석이 불렀던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으로 시작되는 <비둘기집> 노래 역시 단란한 집을 비둘기에 비유했다.

비둘기는 부리를 대고 목을 들어 올려 물을 마시는 다른 새들과 달리, 물을 마실 때 부리를 대고 빨아 마시는 특성을 지녔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비둘기가 목이 메지 않는 새라 하여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조선 시대 왕들은 노인들에게 장수를 기원하면서 ‘구장(鳩杖·손잡이에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을 선사했다.

■ 공공의 적, 전 세계적 비둘기의 몰락

비둘기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온 새다. 무엇보다 집을 찾아오는 귀소성이 뛰어나기 때문. 한나라 때 서역 정벌에 나섰던 장건은 통신 수단으로 비둘기(전서구)를 이용했다. 서신을 전달하는 통신용 비둘기 전서구는 기원전부터 사육했다.

비둘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의 속성을 지녔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 속 비둘기는 상서로운 존재다. ‘노아의 방주’에서는 비둘기가 물이 빠졌음을 알리는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왔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다. 비둘기는 세계적으로 300여 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7종이 살고 있다. 사람보다 먼저 한반도에 살았다.

몇 마리 안 남은 토종 ‘양비둘기’를 비롯해 도심에서 흔히 보는 집비둘기, 울릉도·흑산도·제주도 등 섬의 흑비둘기, 산비둘기라고도 불리는 멧비둘기, 홍도 등 서해 오도에 사는 소수의 염주비둘기 등이 서식한다.

집에서 많이 키웠던 집비둘기는 야생 비둘기를 길들여 사육한 것. 수도권의 비둘기는 150만 마리로 추정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각각 집비둘기 3000마리를 방사한 다음부터 급증했다. 천적인 매나 황조롱이가 도시에서 살 수 없어 비둘기가 계속 늘어났다. 세계 각국에서 비둘기는 ‘공공의 적’으로 추락하는 잔혹사를 쓰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갈 경우 비둘기 모이를 주면 안 된다. 베네치아 도심에는 비둘기가 너무 많아 고민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손으로 비둘기 모이를 줄 경우 벌금을 부과한다. 스위스나 뉴욕에서도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다가 벌금 폭탄을 맞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둘기는 유해 동물의 하나로 지정됐다. 비둘기의 대 굴욕이다. 하지만 모든 비둘기가 유해 동물이 아니다. 일부 지역의 집비둘기가 대상이다. 비둘기는 사람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기 때문에 도시의 대기오염 ‘경고등’ 역할도 한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대올림픽 때부터.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때도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실제 비둘기 대신 조명으로 등장했고, 드론이 비둘기 대형으로 밤하늘을 날았다.

과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치세력 중 전쟁을 지속하고 더 크게 벌려야 한다는 ‘파, 전쟁을 그만두고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파’가 있었다. 이때부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파를 ‘매’,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 온순한 파를 ‘비둘기’라고 빗대면서 매파 vs 비둘기파의 유래가 됐다. 남북문제 등 모든 사안에서 ‘매’냐, ‘비둘기’냐 하는 극단보다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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