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 부대, 청룡 부대, 비둘기 부대. 월남전 즉 지금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 부대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도 낙타부대, 비둘기 부대가 운용된다. 상징 동물이 아니다. 실제 동물로 이루어진 전투 자산이다.

동물도 참전한다. 예부터 동물은 전쟁의 도구인 동시에 희생물이 됐다. 고대부터 근대 이전의 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동물들은 흔히 생각하는 운송수단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상상 이상으로 이용됐다.

탱크가 없던 시절 코끼리는 적의 견고한 보병 방진을 뚫는 역할을 했다. 로마를 침공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처럼. 동남아와 인도에서 전투 코끼리는 유용한 전략 무기로 쓰였다. 전성기 100만 명이 살았던 캄보디아 앙코르 왕조는 20만 마리가 넘는 코끼리를 전쟁용으로 키웠다.

명·청 교체기 군벌 오삼계는 45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갖고 있었다. 그가 미얀마 원정 때 획득한 코끼리로 추측된다. 현재는 윈난성과 미얀마, 라오스 사이의 국경지대에 약간이 남아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훈련시킨 비둘기 ‘전서구’는 오늘날까지 군 통신에 이용한다. 불과 한 세기 전, 1차 세계대전은 역대 최대 규모로 동물이 동원된 전쟁이었다.

육지에 군견이 있다면 바다에는 군용 돌고래와 바다사자가 그 일을 한다. 냉전시대 구소련 해군은 돌고래를 가미카제 ‘자살 무기’로 사용했다. 돌고래는 자신의 등에 폭탄을 묶은 채 목표물에 부딪혀 자폭하게끔 훈련받았다. 그 와중에 수백 마리가 죽어나갔다. 또 기뢰를 탐색하고 시험 발사된 미사일을 찾거나 회수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미군은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바닷속 숨겨진 기뢰나 적 잠수요원을 찾아내는 동물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미 해군 대테러 작전 부대는 5개 팀에서 병코돌고래 90마리, 캘리포니아바다사자 50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명령이 하달되면 수송기를 이용해 72시간 내 지구상 어느 바다라도 돌고래와 바다사자를 실전 배치할 능력을 갖췄다.

돌고래 부대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것은 베트남 전쟁. 탄약고가 설치된 캄란 만 부두에 5마리가 투입돼 수중으로 침투하는 적 잠수요원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에는 페르시아 만에 먼저 돌고래 부대가 투입되어 해상로를 점검했다. 지난 2011년 2월, 미 해병대는 동해에서 돌고래를 군사작전에 투입하려고 시도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 후 처음 열린 한미 연합 ‘독수리 훈련’에서 큰 돌고래 4마리를 반입시키려 우리나라 정부에 의뢰했었다.

돌고래들은 포항 청림동 신항 해군기지에 수용돼 있다가, 작전이 시행되면 약 2㎞ 떨어진 도구해수욕장 앞바다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기뢰 제거, 함정 호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돌고래 특공대’는 훈련 방식과 작전 수행 과정의 위험성 때문에 세계적으로 논란거리다. 우리나라도 돌고래와 바다사자를 훈련시킨다면, ‘1번 어뢰’에 취약한 서해 그리고 우리의 바다까지 수호할 수 있으려나.

■ 6.25 전쟁 속에 사라진 신설동 경마장 가는 길

몽골군에 말이 없었으면, 과연 칭기즈칸은 세계의 패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라고 한다. 하지만 간혹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동물들도 있다. 이 동물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짠한 감동을 선사한다.

1997년 ‘LIFE’지는 ‘우리들의 영웅들’이라는 특별판을 발행했다. 여기에는 워싱턴, 링컨, 제퍼슨 대통령을 포함해 마틴 루서 킹과 마더 테레사 등 100명이 올라갔다. 그런데 수많은 인물들과 의문의 ‘말 한 마리’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레클레스’라는 이름의 작은 암말. 믿기 힘든 이야기다.
 
그녀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26일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즉시 전장에 투입된 그녀는 탄약을 나르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상이용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퍼플 하트를 비롯 대통령 표창장과 국방부 종군기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말단 사병에서 하사관까지 진급한 그녀는 모든 전우들의 인기를 독점했다. 식탐도 대단했다. 여가 때면 전우들과 모닝커피를 마시는 것을 가장 즐겼고 스크램블 에그와 팬케이크, 콜라, 심지어 맥주까지 좋아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결혼도 하고 슬하에 자녀 셋 두었다. 모두 엄마를 닮아 용감했고 매력적이었다. 1960년 캠프 펜들턴에서 영광의 전역식을 가진 그녀는 1968년 5월 13일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영화 ‘워 호스(War Horse)’가 1차 세계대전 버전이라면, 그녀는 한국전의 숨은 영웅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제주. 몽골 암말인 본래 이름은 ‘아침해’.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서 트랙을 질주하던 경주마였다. 이마엔 하얀 줄이 있었다. 우리나라 경마는 1928년 9월 20일 경성 경마장이 효시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기습적으로 북한군이 남침을 했다. 전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신설동 경마장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요경마가 열렸다. 불안한 조짐이 나타난 것은 제4경주가 시작될 무렵. 정체불명의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경마장 상공에 나타나 전단지를 살포하고 사라졌다. 전단을 주워 읽은 사람들은 그 비행기가 북한 정찰기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곧 확성기를 단 군용 지프가 나타났다. 장병들의 즉시 귀대를 명령하고,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방송했다. 경마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신설동 경마장을 탱크와 차량 등 군 장비를 보관하는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이 때문에 경마장은 유엔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됐다. 경마장에 있던 경주마 200여 마리는 인민군이 징발해 갔다. 신설동 경마장은 1951년 서울 재탈환 후 유엔군의 비행장으로 사용됐다. 뚝섬 경마장은 1954년 5월 8일에 개장했다.

‘아침해’가 전장에 투입된 계기는 이렇다. 1952년 10월경 신설동 경마장 인근에 살던 ‘김혁문’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이때 수송용 군마를 구하던 미 해병 1사단 5연대 무반동총 화기 소대의 에릭 피터슨(Eric Petersen) 중위는 250달러를 주고 ‘아침해’를 샀다. 1948년 생으로 당시 5살. 미군은 산악지역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탄약보급의 어려움을 겪었다.

청년이 사랑하는 말을 팔았던 까닭은 지뢰로 인해 다리를 잃은 여동생 김정순에게 의족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주인이 바뀐 1952년 10월 26일이 ‘아침해’의 입대일이 됐다. 미 해병은 이 말이 전투 소음에 반응하지 않도록 특별훈련을 시켰다.

■ 한국전쟁의 용감한 그녀 ‘레클레스’ 하사를 아시나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그해 3월 미 해병 1사단과 한국 해병 연대는 연천에서 중공군 120사단 등과 맞붙었다. 이른바 네바다(베가스) 전투.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 동안 전투에서 중공군은 1351명의 전사자와 363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군과 한국 해병도 약 300여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아침해’는 탄약 운송을 도왔다. 수십 kg의 75mm 무반동총 탄약을 짊어지고 급경사 산비탈을 오르내렸다. 전투 초반 3일 동안 하루에 51번이나 최전선 고지까지 탄약을 날랐다. 심지어는 탄약이 필요하다는 래섬 병장의 외침을 듣고 혼자 보급기지를 갔다가 왔다.

전투 4일차 ‘아침해’는 포탄 파편에 왼쪽 눈 부근과 왼쪽 옆구리를 맞아 부상을 당한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연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탄약을 나르는 모습에 전우들은 ‘Reckless(겁이 없다는 뜻)’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레클레스는 그 이름처럼 ‘무모하도록’용감했다. 철조망도 잘 넘었다. 해병들은 이런 그녀를 무척 아꼈다. 행여 그녀가 다칠까 봐 자신이 입고 있던 방탄조끼를 벗어 줄 정도였다.

‘아침해’가 운송한 4톤 무게 386발의 로켓포탄은 당시 조달된 탄약의 95%에 달하는 양. 미 해병대가 나른 포탄은 5%에 그쳤다. 전투에서 ‘아침해’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와중에 전선에서 부상당한 병사가 있으면 그들을 싣고 산에서 내려와 안전하게 내려놓고, 다시 탄약을 싣고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닷새간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와 라이프 매거진 등 미 언론은 ‘해병마 레클레스(Marine Horse Reckless)’의 특집 기사를 경쟁적으로 실었다. ‘아침해’는 전투가 종료된 후 상병, 1954년에 병장으로 진급했다.

정전 협정 후 전우들과 함께 미국에 오게 된 레클레스는 미국의 가장 용감한 전마로 사랑을 받았다. 1957년과 59년, 64년에 차례로 후손도 배출했다. ‘피어리스’(Fearless·용감) ‘돈트리스’(Dauntless·불굴) 등 한결같이 모전자전 이름이었다.

1959년 8월 31일, 레클레스는 미 역사상 최초 하사관으로 진급한 군마가 됐다. 군악대와 19발의 예포까지 동원됐다 1,700여 명의 해병이 퍼레이드까지 하면서 진급을 축하했다. 1960년 성대한 전역식을 가진 레클레스는 은퇴 연금(곡식)을 받았다. 1968년 5월 레클레스가 죽자 미 해병대는 참전 군인을 대하듯, 엄숙하게 정식 장례식을 치르고 비석을 세워 마지막까지 최대한 예우를 다했다.

미 국방부는 2013년 7월 한국전 정전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버지니아 관티코 해병대 본부에서 그녀를 위한 기념관 헌정식을 가졌다. “그녀는 말이 아니었어. 그녀는 해병대였다!(She wasn’t a horse. She was a Marine!)” 추모 웹사이트(www.sgtreckless.com)에 한 미국 네티즌이 댓글을 달았다. “스필버그 감독님, 이제 영화 ‘레클레스’를 만들 차례에요.”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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