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동물 용. 봉황·기린·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다. 물속에서 살며 때론 하늘에 오르고, 비·바람·번개·구름을 일으킨다. 가뭄을 막고 풍농과 풍어를 도와준다. 용의 순수한 우리말 ‘미르’는 물(水)의 옛말 ‘믈’과 상통한다. 용의 기원은 중국 양쯔강 유역에 생존했던 악어 혹은 왕도마뱀에 가까운 동물로 추측된다.

고대 중국은 지금과 달리 코끼리나 코뿔소같이 다양한 동물이 살았던 환경이었다. 갑골문 때부터 용의 상형 문자가 등장한다. 용의 머리는 낙타 같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목덜미는 뱀, 배는 이무기,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 귀는 소’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 9가지 동물 특징을 결합해 강력한 존재가 됐다.

용의 유일한 급소는 역린. 목에 거꾸로 난 된 비늘이다. 이를 건드리면 용(군주)이 분노한다. 육십갑자 12지를 이루는 띠 동물이지만, 유일하게 용만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런 동물을 만들어 냈을까? 생물학적으로 실존하는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최상의 존재를 상정한 것. 이런 까닭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왕권과 불교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왔다. 용의 모습은 궁궐이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동북아 창세 신화 속 군신 치우와 맞붙은 황제는 용의 힘을 빌려 치우를 패퇴시켰다. 황제의 얼굴을 용안, 앉는 자리는 용상, 황제의 옷(용포)에 용을 수놓은 것은 지배자를 용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 황제를 표시하는 용은 발톱이 5개(오조룡), 왕이나 황태자는 4개로 정했다.

■ 같은 듯 다른 신화와 전설 속 용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도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아마 시조들의 비범함과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지상에 내려올 때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탔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부인 알영은 용이 알영정 우물가에 나타나 낳은 딸이라고 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위용 넘치는 용 한 마리가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백제 말기 ‘조룡대’ 설화도 주목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강에서 백마를 미끼로 백제왕을 돕는 용을 낚자 곧 백제가 멸망했다. 여기서 용은 사실상 백제의 왕실 또는 왕권을 보호하는 호국용을 의미한다.

신라 거타지 설화, 태조 왕건 탄생과 관련한 작제건 설화에도 우물과 용녀가 비중 있게 나온다. 태조 왕건의 할머니, 즉 작제건의 아내가 용으로 등장한다. 용꿈은 최고의 꿈으로 쳤다. <용비어천가>가 바로 그런 예다. 조선 태조 이성계 할아버지 도조의 꿈에 백룡이 나타난다. 흑룡을 죽여 달라는 청을 들어주자, 백룡이 도조에게 자손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

용은 산을 지키는 호랑이와 영원한 맞수였다. 대칭 관계를 이루어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라는 풍수지리의 기본구도를 만들었다.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면,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넣었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처럼, 두 동물이 싸울 때는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비가 온다는 풍습에서 비롯됐다.

호랑이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물속에서 용은 단연 최고다. 모든 하천과 호수에는 그곳을 관리하는 용신이 있었다. 용소·용정·용연·용담 등은 전국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지명들이다. 신으로 숭배되는 용중에서 네 곳의 바다와 비바람을 관장하는 사해용왕(四海龍王)이 가장 유명하다. 사해용왕의 바닷속 궁전, 즉 용궁을 수정궁이라 한다.

<심청전>에서 효녀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 제물이 되었으나 다행히 용왕이 구해준다. <별주부전>에서 용왕을 살리고자 토끼의 간을 찾아 육지에 온 자라는 토끼를 데리고 바다 용궁으로 간다. 지금도 한 해의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어민들은 바닷가 앞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 서양인들이 용을 싫어하는 이유

용은 대륙의 중국, 해양의 일본, 반도의 한국, 그리고 서양에서 각각 다른 문화로 발전해 왔다. 중국 무협영화 제목에는 ‘용’이라는 말이 특히 많이 들어간다. ‘용형호제’ ‘용쟁호투’ ‘삼국지 용의 부활’ ‘와호장룡’ 등이 그렇다.

조자룡이라 부르는 <삼국지> 촉한의 무장은 ‘조운 자룡(趙雲子龍)’이다. 하지만 이소룡, 성룡, 적룡 등과 같은 유명 액션 영화배우는 사실 본명이 아니다. 영웅적 캐릭터를 극대화하기 위해 용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빌렸다.

일본 역시 용의 신화가 여럿 존재한다. 일본의 용은 토지를 수호하는 토지신 개념이 강하다. 일본 고서에 등장하는 ‘용왕태랑(龍王太郞)’은 인간인 아버지와 용의 화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짐승을 부릴 수 있는 소환수의 능력을 타고난 그는 어머니가 남긴 적의 정체를 밝혀 주는 음양 거울을 들고 모든 악귀와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도둑, 반역자를 물리쳤다. 강인함과 힘의 상징인 ‘용왕태랑’은 일본 사무라이에 이어 지금도 야쿠자들이 가장 열광하는 타투다.

일본에서 용은 문화 콘텐츠로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 중국과 달리 권위적 상징성보단 대중문화에서 인기를 끌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하쿠’라는 백룡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년만화의 영원한 바이블 ‘드래곤볼(용의 구슬)’ 제목 그 자체로 신비의 구슬을 7개 모으면, 신룡이 나타나 ​소원을 하나 들어 준다.

주머니 속의 괴물 ‘포켓몬스터’ ‘망나뇽’은 서양식 용을 모티브로 했다. 용답게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시대가 변화면서 문화콘텐츠로 흡수되기 위해 그 상징물이 갖는 권위가 깨지고, 자연스럽게 친근한 캐릭터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양에서는 용을 싫어한다. 서양의 드라곤(Dragon)은 파괴적이고 부정적 이미지다. 생김새도 차이가 난다. 동양의 용은 사슴뿔이랑 사자 갈기랑 수염 달린 뱀에 가깝다. 서양 용은 흔히 박쥐 날개 달린 커다란 도마뱀 같은 모습이 부각된다.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볼 수 있듯 입에서는 불도 나온다.

동양에서 용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으로 인식한 반면, 서양에서 용은 숭배가 아닌 퇴치 대상이다. 용을 물리쳐야 성을 되찾고, 붙잡힌 공주를 차지할 수 있다. 영웅이 이겨내야 할 대상이며, 악마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용은 성경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사탄이다. 7개의 머리와 10개의 뿔이 달린 레드 드라곤으로 머리에 7개의 왕관을 쓰고 있다. 일곱 머리는 기독교에서 저질러선 안 되는 7대 죄악(교만, 질투, 분노, 탐욕, 식탐, 나태, 색욕), 10개의 뿔은 평소에 저지르기 쉬운 작은 죄를 뜻한다.

곧 이 드라곤은 인간에게 죄를 저지르게 하고 타락시키는 사악한 존재다. 때문에 7대 죄악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실로 만 악의 근원. 인간에게 죄를 저지르게 한다는 점과 사탄의 현신이라는 점에서 창세기에 나타나 선악과를 인간에게 먹인 뱀과 동일시된다.

■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대한민국을 꿈꾸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일컫는다. 서구권에서는 용보다는 호랑이로 더 많이 부른다. 영어 위키백과도 ‘Four Asian Tigers’라고 쓰고 ‘용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부연 설명한다. 용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 차이 때문. 한국에서는 이 말이 경제성장을 인정해주는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되어 한때는 열심히 써먹었다.

용이 붙은 말 중에 ‘용오름’ 현상이 있다. 지표면이나 해수면까지 기둥이나 깔때기 모양의 구름이 드리워지면서 강한 소용돌이가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여름 경주에 물고기가 비에 섞여 떨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흔히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승천하는 모습으로 간주한다.

용은 입신출세의 상징이다. 우리 민족은 용꿈을 꾸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다. 대문에서부터 아이들 공부방에 용 그림을 붙여 놓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지명을 보면, 십이지 동물 가운데 ‘용’이 들어간 곳이 가장 많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전국 1261곳에 달한다. 호랑이 관련 지명 389곳의 약 3배, 토끼 관련 지명 158곳의 약 8배다. 용이 들어간 지명 중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용산’으로 전국 70곳에서 쓰고 있다. 세종시 정부 청사 건물은 용틀임 모양으로 배치했다.

중국 황하 상류 협곡에 매우 물살이 센 여울이 있었다. 웬만한 물고기는 여기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뛰어오르기만 하면, 물고기가 용이 된다는 전설이 전한다.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용문에 오른다는 ‘등용문’은 성공의 관문을 이르는 말이 됐다.

‘용봉탕(龍鳳湯)’은 보양을 위해 잉어와 닭을 이용해 끓여낸 요리. 잉어를 용에 비유한 것은 등용문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지역별로 잉어 대신 자라나 메기를 넣거나 함께 넣어 요리하기도 한다.

용은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기 위한 환경은 잡다한 먹잇감이 풍부한 탁한 물이 아니다. 거센 여울이거나 태풍이 몰아치는 심해다. 연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서 가장 높이 날 듯이.

그러나 대권이라는 헛된 꿈을 꾸며 참칭하는 몇몇 ‘잠룡’보다 온 힘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가 발전하는 법. 이제 다시 개천에서도 용이 나와야 한다. 갑과 을, <설국열차>의 꼬리 칸이 고착화돼선 안 된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네 마리 용 중 유일하게 추운 겨울이 존재하는 나라이지 않은가.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지금 발끝을 딛고 날아오르며 용틀임할 수 있는 계절이 왔는가?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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