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박승규 문화평론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한반도에 청동기 문명이 북방으로부터 들어왔다. 맹수의 위협과 험난한 대자연 속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었던 선사시대 사람들은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 곧 신을 필요로 했다. 선사 인류들은 신과 사냥의 대상이 되는 동물을 바위에 새겼다. 암각화는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 인류의 가장 오래된 표현 예술이자 일종의 기록이다. 전 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 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다.

바이칼 호수 그리고 몽골과 러시아·중국·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오지 ‘알타이’(Altai) 산맥 주변은 우리 민족의 시원에 관한 숨겨진 역사를 품고 있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부여족’의 뿌리로 추정되면서 관심이 높아지는 곳이다. 몽골 중부 지역은 수많은 동물 암각화가 마치 동물원을 연상케 한다. 고래 그림으로 유명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암각화 중 특히 기린이 눈길을 끈다. 몽골 사막 한복판에 기린 암각화가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상당수 몽골의 선사 문화는 아직도 초원에 묻혀 있다. 수만 년 전 몽골 초원은 아프리카 세렝게티처럼 기린과 코뿔소, 코끼리가 어울려 놀았다.

원래 기린은 환상 속의 동물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풀 뜯어 먹는 기린과는 다르다. 일본 기린맥주 상표를 떠올리면 된다. 모든 짐승의 왕, 선조 격이다. 수명이 1000년이 넘는다. 수컷은 ‘기·麒’, 암컷은 ‘린·麟’. 봉황(鳳凰)이나 원앙(鴛鴦)과 같은 암수 조합. 사슴의 몸, 늑대(용) 얼굴, 머리엔 뿔, 말의 발굽, 몸에는 비늘이 덮였다. 살아있는 풀, 벌레는 절대 밟지 않고 단숨에 천 리 길을 달려가고 하늘을 난다. 이를 빗대 재주가 뛰어나고 비상한 사람을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고 부른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린을 낙타와 표범의 교잡종으로 생각
 
기린의 등장은 성군, 혹은 성인의 등장을 예고한다. 왕이 정치를 잘해 태평성대를 이룰 때 출현한다는 전설을 가진 봉황과 평행이론이다. 정치를 잘하면 동물에까지 감화가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 과거 중국에서는 기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아마 원조는 사슴과 유사한 ‘사불상’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사불상은 당나귀, 말, 소, 사슴의 특징을 동시에 닮았다. 악어를 용의 아종으로, 펭귄을 날개 달린 물고기로, 코뿔소를 독각수 ‘유니콘(Unicorn)’으로 기록한 것과 비슷한 셈이다.

공자가 태어날 때 공자 어머니가 기린 태몽을 꿈을 꾸었다는 설이 있다. 기린이 나타나 비취옥을 토해냈고, 거기에 ‘무관의 제왕’이 될 것이라고 적혀있었다는 것. 과연 진실일지 확인할 수 없지만, 기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공자가 <춘추>의 집필을 멈추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난세에 기린이 잡혀 죽었으니 어진 정치를 펼칠 수 없다며 <춘추>의 마지막 대목을 ‘서수획린’(서쪽에서 사냥하다 기린을 잡음)으로 맺었다. 나중에 ‘획린’이라는 단어가 절필이나, 임종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 이유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린의 문화코드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죽을 때 기린을 타고 승천해서, 시신 대신 옥 채찍을 무덤에 묻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선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적었다.

우리는 국사와 세계사를 따로 배우기 때문에 주몽이 마치 오래된 신화 속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주몽은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비슷한 연대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노련한 정치가였던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식되고,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전설을 가진 신의 아들로 그려진다.

우리 고대사 기록이 로마나 중국에 비해 몹시 아쉬운 장면이다. 영국만 해도 주몽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인 5세기~6세기의 기록조차 극히 부실하다. 아서 왕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아니면 가공의 인물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역사 기록과 보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라 지증왕 능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천마가 기린이 아니냐는 논쟁은 여전하다. 적외선 촬영한 결과 뿔(혹은 상투)을 발견, 기린을 그렸다는 설, 말에 상투 비슷한 장식을 하는 풍습이 있어 말을 그렸다는 학설이 대립한다.

고려 때는 서경(평양)에 기린각(麒麟閣)을 설치해 왕이 강의를 듣고 시를 짓는 공간으로 썼다. 조선시대에는 적실 왕자(대군), 흥선대원군 등이 기린 흉배를 달았다. 왕릉의 석물로 기린상을 배치했으며, 왕실 의식에서 기린 깃발을 앞세웠다. 중국과 달리 한국의 민화나 고종, 순종의 능에 석수로 배치된 기린은 일각수로서 특징인 외뿔이 남아있다.

■ 기린은 왜 목이 길까?

기린 목뼈는 다른 포유동물처럼 7개. 뼈 한 개가 20cm를 넘는다. 단순히 높은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새순을 따먹기 위해 그렇게 목이 길어졌다고 볼 수 없다. 요즘 날씬하고 키가 큰 체형이 열 손실을 돕는다는 ‘체온 조절설’이 대두된다. 먹이 채집이나 적 발견, 도망가는 속도 등은 길어진 목과 다리로 인한 부수적인 이득이라고 한다.

기린은 실재하지 않고, 여전히 상상 속에 살고 있는 존재다. 중국에서 기린은 ‘목이 긴 사슴’이라는 뜻의 ‘장경록(챵징루·长颈鹿)’으로 불린다. 한때 명나라 정화 함대가 가져온 기린으로 인해 실재의 무대로 나왔지만, 이내 다시 신화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1414년 4차 항해에 나선 정화는 북경에 기린을 가져왔다. 원래 케냐와 탄자니아 사이 ‘말린디 왕국·마림국(麻林國)’에서 지금의 방글라데시 ‘벵골국·방갈라국(方葛剌國)’ 술탄에게 선물한 것. 벵골의 술탄은 대함대를 이끌고 나타난 정화를 통해 기린을 다시 명나라 영락제에게 진상했다. 성군의 등장을 알리는 전설 속의 기린을 찾았다는 소식에 영락제는 자금성 봉천문에서 친히 ‘기린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의식을 주재했다. 상서로운 영물로 여겨진 기린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집권한 영락제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정치적 상징이 됐다.

나이 어린 황제와 강력한 숙부,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단종과 수양대군의 관계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 그 후 5차 항해에 나선 정화 함대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까지 진출했다. 기린을 비롯해 사자와 타조와, 얼룩말 등의 진기한 동물을 중국에 가져왔다. 조선에서는 기린을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고 1414년(태종14) 9월과 세종 때 두 차례에 걸쳐 축하사절단을 보내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기린’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제에 사슴이 많았던 데서 유래했다. 진짜 기린이 아니라 사슴을 형용한 지명. 조선 태종13년(1413년) ‘기린현’으로 개칭됐다.

■ 조선 제일검 무사 백동수는 왜 강원도 기린협으로 들어갔나?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에는 ‘십승지(十勝地)’가 나온다. 전쟁이나 전염병, 흉년 등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는 길지를 말한다. 물·불·바람 세 가지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이른바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 재미있는 것은 북한에는 단 한곳도 없다. 그 밖의 피난처로  강원도 인제 산골짜기의 ‘삼둔·오가리’를 꼽는다.

‘둔’은 산골 안 너른 땅, ‘가리’는 계곡 주변의 밭을 일굴만한 땅을 일컫는다. 삼둔은 홍천군 내면의 살둔(생둔), 월둔, 달둔. 오가리는 인제군 기린면의 연가리, 명지가리, 명가리, 적가리, 아침가리를 든다. 기린면 일대는 예로부터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찾아든 산간오지였다. 흉한 손길을 피해 몸을 피한 건 사슴만이 아니었다. 더러는 난을 피해, 더러는 포악한 군주를 피해 사람들이 숨어들었다.

방태산과 곰배령 등 사방이 험한 산들이 둘러싸 견고한 자연 성곽을 이루었다. 워낙 산이 높고, 계곡은 깊다. 바깥세상에 노출이 안 된다. 게다가 그 안에는 제법 경작할 땅이 있다. 쇠 냄새나는 방동약수도 차 넘친다.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향이자, 은둔처로서 그 만한 데가 드물다. 자급자족이 가능해 능히 숨어살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한때 아침가리골 안에만 해도 수백 명의 화전민이 살았다. 1960년대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뒤로 모두 소개됐다. 폐교가 된 방동 초등학교 조경 분교만이 흔적으로 남았다

아침가리 골은 조경동이라고도 한다. 아침에 밭을 갈 정도(조경·朝耕) 잠깐만 해가 비치고 금세 져버릴 만큼 첩첩산중이라서, 또는 밭뙈기가 하도 작아 아침나절이면 다 갈 수 있다 하여 이름 붙였다. 20여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도, 찾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10년 전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해 더 이상 숨은 오지가 아니다. 한 여름 아침가리 골은 진동계곡까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방태산 된비알에서 흘러내리는 적가리 골은 며칠 지내기 좋은 휴양지다.

조선 최고의 협객이자 풍운의 삶을 살았던 남자. 민족 무예를 발전시킨 조선 제일검 백동수. 드라마나 영화로도 소개된 탓에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연암 박지원과 가까운 이덕무의 처남이란 인연으로 여러 ‘연암파’ 등과 친분을 쌓았다. 1771년(영조47) 무과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얻지 못했다. 1773년, 30세의 백동수는 홀연히 강원도로 떠난다고 선언한다.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무인은 대개 태양인이다. 화(火)의 기운도 많다. 백동수는 기린협에서 세상에 대한 분을 식히고, 다시 기린아로 나설 뜻을 세웠다. 심산유곡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찾았던 것일까? 결국 오랜 은인자중 끝에 정조의 부름을 받고 무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무예도보통지>는 그의 최대의 업적이다. 최근 기린면 현리공원에는 기린 조형물을 세웠다. 지역 역사인물 무사 백동수를 스토리텔링 하는데도 열심이다. 지금 우리들의 진정한 기린아는 누구인가?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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