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정확하게 70년 전 오늘, 1945년 3월 10일, 저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징집돼, 용산의 육군 사단에 입대했습니다. 화물차를 개조한 군 수송열차 안에서 밤새 떨며, 부산에서 이른 아침에 도착한 곳이 용산이었습니다. 얼음이 녹아 질퍽거리는 역전 광장에서 대오를 정리하고 인원 점검을 마친 우리는 용산 병영으로 행진했습니다.

당시 3월 10일은 일본 '육군기념일'로 공휴일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 육군이 만주대륙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이날에는, 5월 27일의 '해군기념일'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 정부가 러일전쟁 승리를 자축해 대대적인 열병식(閱兵式)과 관함식(觀艦式) 등을 가졌습니다. 물자 사정이 좋았던 전쟁 초기에는, 쌀, 설탕, 비누 등의 특별배급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홍백(紅白) 축하 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날 저와 같이 기차를 타고 온 장정은 전부가 조선 청년으로 그 수는 천명 내외였다고 기억합니다. 이 많은 신병이 일단 사단 영내로 들어가자, 각 부대로 분산 배치돼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공휴일이라고 나눠주는 과자 후식을 곁들여 처음 하는 군대식사로 긴 기차여행의 피로를 풀며, 졸지에 달라진 환경에 쩔쩔매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시 용산에는 일본 육군 제19사단 밑에 여러 부대가 있었는데, 제가 배치된 곳은 제26부대 야포(野砲)연대로 포를 끄는 군마(軍馬)를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4주의 고된 신병 기초훈련보다, 이 말들과 친해지고, 그들을 씻고 깨끗하게 군대 용어로 '데이레(手入)' 하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학교에서의 군사훈련과 징병검사 전후에 수시로 있었던 예비 훈련으로, 입대 후의 신병 기초훈련은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처음 하는 이 군마 '데이레'는 정말 무섭고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농촌에서 소는 꽤 많이 다루어 봤지만, 일본 군마를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호령부터 일본어로 된 말 다루기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잘 훈련된 이 군마들의 지능지수는 아주 높아, 우리 신병들의 겁에 질려 주춤주춤하는 태도를 반갑지 않게 여기는 듯, 걸핏하면 뒷다리로 차거나 어깨 등을 물어뜯어 상당히 위험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신병과 고참을 구별하는 지능은 대단했습니다. 말에 채이거나 물리기나 하면 반드시 고참병들의 기합이 따랐습니다.

"너희 같은 놈들은 엽서 한 장이면 얼마든 충원이 되지만, 이 말들은 귀중한 재산이야"라는 게 고참들이 흔히 뱉는 욕설이었습니다. 말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특별했습니다. 사실 기계화가 그렇게 발달되지 않은 당시의 군에서, 전장(戰場)에서의 말의 역할은 대단했으며, 일본 군가(軍歌)에는 그들의 활약을 찬양하거나 희생을 애도하는 구절이 많았습니다.

'흙탕물로 얼룩지고 수염이 길게 자란 이 털보의/어디가 좋아 그렇게 정답게 비벼대며 다가오나'라는 구절도 있고, '오늘의 전투에서 수많은 탄환을 맞고 쓰러진 나의 애마(愛馬)야/용서하라 모두가 나라를 위한 것이니'라는 애절한 표현도 있었습니다.

'신병은 엽서 한 장으로 얼마든지 온다'는 것이 당시 고참병들의 말버릇이었으나, 군 소집영장은 엽서가 아니라, '아카가미(赤紙)'라 불린 붉은 용지에 인쇄된 영장으로 특별 군사우편으로 배달됐습니다. 우리는 이를 '저승사자'라 불렀습니다.

말과의 무서운 기억만이 남는 4주간의 기초훈련이 끝난 어느 날 드디어 공포의 '출동명령'이 내렸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도처에서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어, 신문을 볼 수 없는 우리 신병들도 고참을 통해 어렵게 돌아가는 전세를 대충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병에게 '기합'을 줄 때, "너희들은 어차피 만주나 남양에서 죽을 놈들이야"라는 그들의 욕소리로 짐작이 가기도 했습니다.

무기 하나 없이 다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로 끌려가는 목적지가 어딘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부산에서 낯익은 연락선 아랫간으로 끌려가자, 비로소 일단은 일본 본토로 이동되는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으로 일본 본토 서남 끝의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열차로 약 20시간 이동했습니다.

도착한 병영은 작은 마을의 공회당을 개조한 건물로 울타리나 연병장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약 40명의 신병은 전부가 조선인이었습니다. 병사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육군소위 외에 7~8명의 일본인 기간 요원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 입구에 현판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으나, 우리 부대 이름이 '농경대(農耕隊)'라고 소대장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40여 명의 조선인 신병 가운데, 일본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저와 광주 출신의 '다무라(田村)'라는 창씨(創氏) 이름의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거의가 무학이거나 강습소 등에서 공부를 한 농촌 출신으로, 농경대라는 이상한 이름의 부대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대는 일본 수도 도쿄의 북방 약 40km의 이바라키(茨城) 현의 한 공군 기지에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병사에는 소총 한 자루 없고, 대신 삽과 곡괭이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신설 부대였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예상해 참호를 파는 등 노동력이 필요해 급조된 부대로, 우리 소대에서 좀 떨어진 두 곳에도 신설의 농경대가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군사훈련은 전혀 없고 매일 참호를 파는 혹독한 노동만 있었습니다. 모내기 등 농가 일을 돕는 좀 호강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노동에 익숙지 않고 체력이 약한 저에게는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게다가 통역하는 일과, 휴일 고향에 편지 쓰는 일까지 맡아 생지옥 같은 부대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호주 전투기의 저공(低空) 기총사격(機銃射擊) 공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호 파는 일이 주목적이었던 이런 기이(奇異)한 군대생활도 넉 달이 채 안돼, 일본의 항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패전의 혼란 속에 귀국 길은 군용선이 없어 소형 어선으로 태풍 철의 현해탄을 건너는 목숨 건 모험이었으나, 그해 9월 초에 고향 땅을 밟아, 그리운 부모님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유행하던 속담 '묻지 마라 갑자(甲子)생'의 행운이었습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TIME 서울지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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