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글쓰기

[천경 작가]

이 글은 나를 위해 쓴다. 너무 긴 시간 동안 쓰지 않았잖아! 무엇인가가 속삭인다. 쓸 시간이야! 이때 쓰기라는 행위는, 내가 삶을 잘 살도록 일깨우는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무엇이다. 그러니까 ‘쓰기’는 주저앉아 있는 내 앞에 내밀어진 따뜻한 손, 혹은 엄격한 스승이 된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물질성으로 기능한다.
 
‘쓰기’라는 실천을 통해 나는 ‘관찰의 장’으로 불려 나온다. 이 쓰는 행위를 통해 내가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이 드러나며, 쓰는 순간 이 관계는 다르게 변용된다. 또한 타자와 관계맺고 있는 방식과 패턴이 드러난다. 쓰고 있는 이 순간 나와 나, 나와 타자와의 관계는 다른 배치의 장(場)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글을 쓰는 자들은 경험한다. 그 경험은 자기를 ‘초월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나는 타자가 된다. 탈아(脫我). 그것은 나의 다른 가능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쓰는 순간, 나는 이 순간의 공기와 이 창문들과 이 정오의 햋빛들과 이 공간과 이 노트북과 내 방의 모든 사물들을 다르게 경험한다. 다시 말해 쓰기 전의 순간과 쓰는 행위 중에 있는 나는 사물들과 다른 관계를 구성한다. 그것은 종종 나를 고양시킨다. 저 햇빛과 차가운 겨울 하늘, 창밖 아이들의 소리, 자동차의 경적을 다르게 감각하게 된다.

이 순간 내가 더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거나 마음이 순화되는 경험을 한다. 이 순간은 나를 다른 실천의 장으로 몰아세우고 나는 다른 지점에 도달한다. 위치가 변하면 존재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쓰는 동안은 새로운 존재의 창조의 순간이며 이 세상과 처음처럼 만나는 순간이다. 그때 나는 다른 가능성의 자기를 경험한다. 이제 쓰기 전의 나, 쓰고 있는 동안의 나, 쓰고 난 이후의 나는 각기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느낌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해서 쓰는 행위는 자기 수련이 되고, 쓰기라는 도구는 내겐 실존의 필수품이 된다. 또한 살면서 겪게 되는 간난신고(艱難辛苦)에 우리가 잘 대응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나를 강하게 해주고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이렇게 몸에 품고 다닐 수 있는 자기 수련의 도구를 파라스케우에(paraskeuê, 장비)라고 했다.
말하자면 삶에서 우리를 강하게 하는 데 필요한 어떤 ‘실천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위기의 순간, 바로 내 안에서 꺼내서 그 순간에 적용해 쓸 수 있는 물질 같은 것이다. 이것은 ‘진실된 담론’과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진실된 담론’은 ‘정언명령’이 되어 행위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해서 삶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이 물질같은 금언들과 이야기들을 당대 사람들은 품에 지니고 다니려고 오랜 수련을 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니 기록이 용이하지 않았다. 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 속에 새겨 넣으려고 금언이나 스승들의 말씀을 암기하고 또 암기했다. 이때 암기라는 것은 몸에 체화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몸에 각인하고 있는 물질로서의 장비. 진실된 담론들은 즉각적으로 나의 삶에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파라스케우에(paraskeuê). 나에겐 글쓰기라는 것이 이런 효력을 발휘한다.

돌아보면 내게는 ‘쓰기’가 중요했다. 나뿐이랴! 쓰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유용한 도구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성찰의 도구, 혹은 새로운 삶의 결의를 다지고 벼리는 수단.

써야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처방전으로 나에게 등장한다. 여러분도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이 지금 즉각 꺼내 쓸 수 있는 삶의 처방전을 꼭 찾아내시길 희망한다. 그것은 이미 주어져있는 것이기보다는 부단한 노고를 통해 발명해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고행같은 수련 행위들의 실험과 반복적인 노력을 통해 얻게되는 변용되는 신체성의 길을 향한 나아감일 수도 있겠다.

 ‘천경의 미셸 푸코 읽기’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내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실존의 미학에 대해. 우리들은 각각 자기 삶을 작품으로 빚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 잘 만들어야 한다. 작품을 잘 만들려면 많은 실천적 도구들이 필요하다. 그 도구들에 대해 사유하고 그 방법론에 대해 푸코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하려 한다. 어느 밤,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 나의 작품을 잘 만들었나?” 물어보면 “응 오늘 쓸만한 걸 만들었어!” 라고 할 수 있기를 나에게 바란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행해졌던 자기 수련 혹은 자기 테크놀로지(자기 돌봄의 기술)의 방법론들을.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의 후기 사유에 속하는 <주체의 해석학>같은 책을 논한다고 하면 학술적이고 사변적인 글쓰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변잡담 수준으로 푸코의 철학을 이야기할까 한다.

<주체의 해석학>은 1981-1982 동안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녹취해서 출간한 책이다. 푸코의 말기작에 속하는 이 책은 말하자면 자기수련의 방법적 도구로서 ‘실존의 테크닉’들에 대해 논한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까 이 연재는 이 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글들이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뮤즈(Muse) 여신들에게 기도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뮤즈 여신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고마움을 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제 쓰려는 이 글은 뮤즈 여신들의 도움으로 쓰여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뮤즈들(무사이, Mousi)은 시가(詩歌)의 여신들이다. 이 말은 2020년을 사는 나에게도 해당한다. 글을 쓸 때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내 안팎에 우글거리는 타자들이다. 내 안팎에서 나를 관통해서 이 순간의 나를 부단히 변용시키는. 이러한 무수한 타자들과 엮여서 나는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하는 내가 내 안팎에 타자들과 조우하며 기록하는 이 글은 내가 아닌 무엇에 의해 기록되고 있는 것이 맞다!

무한의 우주, 그 우주의 수많은 은하 중 이 은하계, 그 중의 한 변방인 지구, 그 지구의 또 다른 변방, 내가 사는 이 소읍에서 나는 거대한 무한과 매 순간 만난다. 이 순간은 매번 흩어지고 생성 소멸하지만 그 한 순간을 절단해내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삶의 이야기를 구성해간다. 그러니 이것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짜같은 진짜, 진짜같은 가짜, 가상, 오류 거짓들의 성찬들이겠다. 작고 작은 이 웅얼거림은 이런저런 무늬를 만들고, 잠시 형태를 짓고 곧 사라질 것이다. 나는 글을 통해 못난 나를 드러내면서, 그래도 이게 내 삶의 모습인 걸 어쩌겠어? 하고 반문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변화됐을 때 박수를 쳐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독자에게 작은 웃음을 준다거나 쓰고 싶은 열망을 일으킨다면 좋겠다. 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독자들을 촉발한다면! 또한 매 순간이 나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의 순간이기를,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여러분도 그러하기를! 

코로나 사태가 오래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곧 백신 접종이 가능해지고 치료제도 나온다고 한다. 조금만 더 버티자! 그런데 다른 생각을 해본다. 단기 처방전이 마련되면 우리는 새로운 코로나 사태가 도래할 때까지 이 위기를 잊고 살게 될까? 그러다가 다시 새로운 코로나가 도래하는 악순환이 반복될까? 이제 삶의 지도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삶의 새로운 상상력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와 석학들에게서 여러 가지 처방이 제시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공동의 삶의 방식의 발명, 이를 위한 전 세계적 공조도 인류의 과제라고 본다. 또 기후변화와 자원고갈의 상황에서 새로운 생태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개개인의 실천적 변화도 필요하다. 미래학자, 생태학자, 철학자들, 정치지도자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서 4차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선진국 진입을 서두르자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코로나가 디지털 세상을 앞당기고 있으니 어서어서 이 방향을 몰려가자고 말하고 싶지않다.

다른 상상력을 펼치자. 뚱딴지같은 몽상같더라도 누구나 그런 사유실험을 펼치기를 바란다. 이 문명의 대안을 사유하는 다양한 탈주를 시도하자. 탈영토화,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딱딱하게 지층화된 영토성에서 달아나는 계속적인 탈영토화를 실험하기. 물론 우리는 지금 이 방법밖에 모른다. 지금 이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 그 안의 소프트웨어를 조금씩 수정해서, 누더기지만 새로 기워서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들어 가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방면에서 여러 가지 다양하고 엉뚱한 모험과 실험들이 펼치기를. 그리고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말했듯이 실존의 새로운 에토스(ethos)를 각자가 발명하기를. 그렇다.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새로운 에토스를 스스로 발명하기. 이와 관련해 나는 푸코가 연구한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실천됐던 실천적 방법론들을 앞으로 소개할 것이다. 그 방법적 도구들을 여러분도 몸에 새기고 실천해보시면 좋겠다. 나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 연재를 마칠 때 쯤이면 나도 여러분도 불쑥 성장했기를.

천경 작가,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 저자.
roserose63@naver.com

<천경의 미셸 푸코 읽기>는 격주 금요일마다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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