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지난 9월 24일 각종 박물관들이 밀집해 있는 워싱턴 스미소니언재단 부지 내에 새로 미국흑인역사문화박물관(The History and Culture Museum of Black Americans)이 개관되었습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현지 언론은 이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크게 보도했습니다. 노예박물관으로는, 미국 최초로 지어진 루이지애나 노예박물관이 있지만 미국 흑인의 옛날과 오늘날을 관통하는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이번에 워싱턴에 개관한 것이 최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박물관은 2003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서명한 법에 따라 건립되기 시작하여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 참석리에 개관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국내 신문에 게재된 대로(중앙일보 9. 26자 1면), 미셸 오바마 여사가 두 대통령 중간에서 부시 전 대통령을 포옹하는 포즈를 취한 이 사진은 미국땅에서 이루어진 흑인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흑인 노예의 후손은 아니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된 사실만큼 미국의 변화를 말해주는 사건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저는 이 박물관 개관 사진들을 보면서, 최근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용의자 총격 살해 사례들의 저변에 흐르는 인종차별 문제를 떠올렸고 그보다 더 멀리는 60년대에 있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 주도 하 미국 공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s)의 험난한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미국 흑인의 역사라면 우선 노예제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이 제도의 철폐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은 아직까지도 미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노예제도를 촉진한 것으로 16~18세기 유럽 각국이 앞다퉈 나선 노예무역의 욕된 역사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에 얽힌 비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내어 1992년 부커상 (Booker Prize)을 받은 ‘신성한 굶주림’ (Sacred Hunger by Barry Unsworth)이란 영국 소설에서는 노예무역선의 항해 중 병들어 죽거나 밀폐된 지하 선실에서 기진맥진 쇠약한 노예들을, 썩거나 많이 상한 과일 내다버리듯 바다에 던져서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당시 그 소설을 읽고 너무나 깊고 생생한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의 스토리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못지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국 루이지애나의 노예박물관과 더불어 오래전부터 있어온 영국 리버풀의 국제노예박물관이, 인간 사회의 그 무엇에도 견줄수 없이 부당하고 가혹한 노예제도의 역사를 잘 새길 수 있도록 해주고 있겠지만 이번에 개관한 워싱턴의 박물관은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흑백 갈등이 미국만큼 첨예한 나라가 없는 데다 또 대중음악처럼 흑인의 문화가 미국만큼 발전된 사회도 없으니까요. 나아가 이 시간까지도 흑백 마찰과 갈등이 미국 사회의 저변을 거칠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 박물관의 존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합니다. 개관식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도 “이곳은 단지 흑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미국인의 것”이라 하고 나아가 “이 박물관은 “우리 모두가 미국임을 강조하고있다” 고 말했습니다.

이 박물관의 전시물은 대부분 개인 소장자들이 기여한 것이라 합니다. 노예무역선의 온갖 도구와 장치들, 노예시장의 ‘판매대’, 노예농장의 회초리 등은 물론 그간 흑인들이 일구어 온, 재즈와 블루스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중문화, 공민권 운동 장면 등을 망라한다고 합니다. 저는 흑백을 막론하고 이 시대의 남녀노소 미국인들이 이 박물관을 둘러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해 봅니다. 많은 미국인에게 이는 매우 아픈 역사인 동시에 인종차별을 넘어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갖도록 다 함께 쟁취해온 승리의 역사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기에 많은 미국 흑인들은 지금도 가슴이 아리고 시릴 것입니다. 사실 미국인의 본류인 백인이 미국 정부의 이름으로 과거의 노예제도에 대해 사과한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 정부 때로 기억되는 노예제도에 대한 역사적인 사과가 현대의 미국이나 또는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얼마만 한 심리적 보상을 가져다 주었을 것인지 저로선 알 도리가 없지만, 여하튼 ‘늦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했어야 할 사과’ 였다고 봅니다.

미국에 사는 흑인은 아니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의 마음을 읽을 기회는 한 번 있었습니다. 1996/97 해외연수 시절 베냉(Benin, West Africa) 대통령을 지낸 한 클래스메이트가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절 줄줄이 묶여 끌려가는 노예 구인(拘引) 장면을 삽화를 곁들여 설명하면서 울먹이다시피 분노를 토로한 장면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강한 부족이 백인에 매수되어 약한 부족을 습격하여 노예로 넘기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그의 마음속에도 조상들의 슬픔과 억울함이 여전히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박물관이 이런 억울함과 분노를 간직한 분들에게 치유의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 몇 마디 사과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희생자나 그 유족, 후손들과 함께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서구의 노예제도와 우리의 노비제도는 얼마나 다른 것일지도 생각해봅니다. 흑백의 다른 인종이라는 것 외에는 물건처럼 사고팔았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노비제도는 우리나라 사회사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여기서 궁구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현대사에서 우리 겨레가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기의 우리 선조들 대부분이 노예적 삶을 살았다는 것은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압박과 설움, 자기 나라 말을 못 하게 하고 자기 나라 글을 못 쓰게 할 뿐만 아니라 민족 자체를 말살하여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화를 획책했던 그 시기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자기 땅에서 노예적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은 자기 나라 국민인데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박물관까지 짓는데 하물며 남의 나라를 강탈하여 긍지 높은 그 국민을 노예화한 일본은, 그간 여러 번 했다는 사과도 변변치 않을 뿐 아니라 교묘한 처신으로 잘한 일인 양 여전히 뻔뻔한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독도 영유권 주장이 그 대표적 사례임.) 저는 주장합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자 한다면 동경이든 어디든, 한 곳 또는 여러 곳에 아시아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박물관을 지으라고 말입니다. 박물관만큼 역사를 성찰하면서 과거를 미래의 거울로 삼을 생생한 배움의 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먼 과거를 상기시켜 주는 미국이나 영국의 노예박물관뿐 아니라 가까운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 미국의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학살) 기념관/박물관들이 이를 생생하게 말해줍니다.

잘못된 역사를 사과하고 반성하는 데 있어 늦어서 못 한다거나 자손들까지 치욕이 될까 봐 못한다는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사사건건 워싱턴 당국의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워싱턴에 들어선 미국흑인역사문화박물관을 보고 스스로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깊이 살펴볼 일입니다. 이웃인 일본이 이런 선진국들의 예를 본받아 (프랑스도 금년 중에 노예박물관 건립을 시작할것이라 함.) 가칭 ‘아시아식민지배역사박물관’을 짓는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젊은 일본 국민을 올바른 미래로 이끄는 것은 물론 이 지역 모두가 앞으로 만들어내야 할 아시아 평화의 커다란 상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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